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재부 간부들에게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 추진 방안을 연말까지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역외 원화 거래 시장을 24시간 개방하지 않고서는 편입 가능성이 제로(0)에 가까운 미션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홍 부총리가 요소수 수급, 물가 안정 등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현안을 다루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MSCI를 숙제로 던진 것이다.
홍 부총리의 주문은 개미 투자자 표심을 사로잡으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해당 이슈를 공약으로 꺼내든 직후 나왔다. 그의 의도가 뭐였든지 간에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맨 꼴’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서 홍 부총리는 종합부동산세(종부세) 폭탄 논란이 터졌을 때도 국가 세제 정책의 관점에서 종부세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대신 “국민의 98%는 무관하다”는 논리로 청와대·여당과 입을 맞춰 비난받은 바 있다. 또 국회의 내년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는 기재부가 올해보다 삭감했던 지역사랑상품권 발행 지원 예산을 이재명 후보 요구대로 증액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 여당 대선후보 공약에 가능성 낮은 MSCI 선진국 편입 방안 주문
27일 경제부처에 따르면, 홍 부총리는 지난 25일 기재부 확대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연말까지 MSCI 선진국 지수 편입 추진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홍 부총리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부문별 로드맵 수립과 서민재산 보호 방안 강구도 연말로 기한을 못 박았다. 이 회의에서 그는 요소수 수급 대응, 생활 물가 안정, 유류세 인하 등 한국 경제의 최대 현안들도 언급했다. MSCI 편입 이슈를 탄소중립, 물가 안정 등의 굵직한 정책 과제와 동급으로 다룬 것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홍 부총리의 지시가 이재명 후보가 지난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 주식시장의 신뢰도를 높여 매력적인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는 길”이라며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이 필요한 이유”라고 적은 후 나왔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 글에서 이재명 지사는 개인투자자들의 공매도(空賣渡·주식을 빌려 판 뒤 주가가 떨어지면 되사서 갚는 투자) 폐지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이유로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 후보는 이틀 전인 18일 유튜브 채널 ‘와이스트릿’의 실시간 생방송에 출연해서도 “공매도를 폐지하면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구조적·근본적으로 외국 투자를 끌어들이고, 국내 시장을 안전하게 하고, 경제 규모에 걸맞은 시장으로 발전하려면 선진국 지수에 편입해야 한다”고 했다.
MSCI 지수는 미국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사가 발표하는 주가지수다. 글로벌 큰 손들이 투자 여부를 판단할 때 벤치마크로 삼을 만큼 영향력이 크다. 현재 한국은 신흥국 지수에 속해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국 증시가 MSCI 선진국 지수로 넘어갈 경우 최대 61조 원의 외국인 자금이 유입돼 코스피가 4000을 넘어설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미 한국은 2008년과 2015년, 올해 6월 등 세 차례에 걸쳐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24시간 굴러가는 역외 원화 거래 시장을 허용하라”는 MSCI의 요구를 우리 외환 당국이 환율 변동성 확대를 우려해 받아들이지 않아서다. 현재 MSCI는 한국을 선진국 지수 승격 대상 관찰국에 포함하지도 않은 상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홍 부총리가 “편입 방안을 연말까지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기재부 내부에서도 홍 부총리의 주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지수 편입의 장점과는 별개로 홍 부총리가 굳이 이 타이밍에 MSCI를 기재부의 우선순위 과제로 끌어 올릴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달 초 영국에서 열린 한국경제설명회(IR)에서 홍 부총리가 MSCI 선진국 지수 편입 재추진을 언급하긴 했지만, 당시 상황은 해외 투자자의 질문에 부총리가 답한 것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기재부 관계자는 “영국 IR 전까지 홍 부총리가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 MSCI 선진국 지수 편입 문제를 거론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자본시장 일각에서는 홍 부총리의 제스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각이 있다. 국내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민간 투자 영역에 MSCI 편입과 관련해 협조를 구하거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거나, 간담회를 연 기억이 없다”며 “4년 넘게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다가 힘 빠진 정권 말에 갑자기 이 이슈를 꺼내 들면 업계로선 대선용 이벤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증권업계 고위 관계자는 “여당 대선후보가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피력하자마자 경제부총리가 간부들 모아놓고 한 달 안에 편입 방안을 모색하라고 하는 건 (홍 부총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여당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꼴”이라며 “기재부가 대선 이후에도 MSCI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는지 유심히 지켜볼 것”이라고 했다.
◇ 홍 부총리, 기재부가 삭감한 지역사랑상품권 예산 증액 의중 내비쳐
이재명 후보의 1인당 20만 원 이상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요구에 완강하게 맞섰던 홍 부총리는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비교적 협조적인 자세로 나오고 있다.
기재부는 지난 8월 발표된 내년 예산안에서 지역사랑상품권 지원사업 예산을 2403억 원으로 대폭 감축하겠다고 했다. 전체 발행 규모와 국고지원 비율을 동시에 줄이겠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2021년의 경우 지역사랑상품권 발행액(20조2000억 원)의 4~8%를 국고로 지원했는데, 2022년에는 국고 지원 발행 규모를 6조 원으로 줄이고 국고지원 비율도 4%로 단일화하겠다는 게 정부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 후보가 예산안 발표 이후 줄기차게 지역사랑상품권 지원사업 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민주당도 거들자 홍 부총리는 입장을 바꿨다. 그는 이달 10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중앙정부가 할인 지원을 뒷받침하는 지역사랑상품권(발행액)을 20조 원에서 6조 원으로 갑자기 줄였다는 지적이 많았고 코로나19 위기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며 “국회에서 계수조정소위 할 때 적극적으로 임해서 6조 원보다 늘리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했다.
반면 김부겸 국무총리는 홍 부총리와 달리 지난 5일 국회 예결특위 종합정책질의에서 “지역화폐가 초기에 가졌던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전국에서 다 똑같이 해버리니까 많이 쓰는 사람한테 혜택이 크게 가는 역진적(逆進的)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이 후보가 주장하는 지역화폐 예산 확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홍 부총리는 최근 초과세수 논란이 일었을 때도 처음에는 “올해 초과세수가 10조 원을 조금 넘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의도적으로 세수를 과소 추계해 이재명 후보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반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압박하자 결국 초과세수 전망을 민주당이 주장한 19조 원으로 조정했다. 또 종부세와 관련해서도 고지 인원과 세액 급증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98%의 국민은 종부세와 무관하다”고 했다. “종부세를 낼 1주택자는 전체의 1.7%뿐”이라고 한 이 후보를 거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