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가 28일 마지막 본회의를 열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이른바 ‘채상병특검법’ 재의결이었다. 국회 재투표에서 부결된 채상병특검법은 폐기 수순을 밟는다. 하지만 이날 폐기된 법안은 더 있었다. 세상이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과학자들에게 중요했던 한 법안도 이날 사라졌다. 바로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다.
이 법률개정안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정년을 61세에서 65세로 높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연연 연구자 정년은 IMF 경제위기 이전에 65세였지만, 이후 꾸준히 낮아져 61세까지 떨어졌다. 출연연 연구자의 사기 진작과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연구 인력 감소의 해결책으로 출연연 정년 연장 카드가 나왔다. 정부와 관계 기관이 합의하며 탄력을 받았지만, 결국 국회를 넘지 못하고 상임위 단계에서 법률개정안이 폐기됐다.
연구자의 정년을 높이는 건 채상병특검법처럼 세상의 관심을 받는 사안은 아니지만, 과학기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보통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과학자는 그렇지 않다. 2017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연구진이 ‘나이 든 연구자가 젊은 연구자보다 창의성,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과학계에서는 정년 제도에 대한 물음표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꼭 좋은 연구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구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해외에서는 연구자의 정년을 없애는 경우가 많다. 연구 역량만 입증한다면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70세, 80세, 90세까지도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정년 연장 제도가 마땅치 않은 한국은 세계적인 석학도 60세가 넘으면 안절부절한다. 정년이 61세인 출연연은 물론, 65세인 대학에서도 잘 나가던 연구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교수가 정년을 맞으면 연구실은 문을 닫고 큰 돈을 들여 마련한 연구 장비와 인프라에는 먼지가 쌓인다. 석학 교수들은 정년을 연장해주는 학교로 자리를 옮기지만, 연구 장비와 인프라를 다시 정비하는데 몇 년을 쓰고 나면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시간은 없다고 한다.
과학기술계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출연연 정년 연장 법안이 좌절됐지만, 일부 대학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포스텍은 정년 연장 여부를 정년이 임박해서가 아니라 50대에 결정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일찍 정년 연장이 결정되면 장기 연구 프로젝트를 할 수 있고, 안 되면 정년 이후를 미리 대비할 수 있다. 포스텍의 시도가 좋은 성과를 낸다면 서울대나 한국과학기술원(KAIST) 같은 대학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박남규 성균관대 교수도 정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꼽히는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의 세계적 석학이자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그런 박 교수도 불안하다고 했다. 박 교수의 정년은 2026년 2월이지만, 석좌교수를 받아 정년 이후인 70세까지도 학교에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엔 어떨까. 박 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97세의 나이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고(故) 존 구디너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를 언급하며 “나도 여건만 된다면 80세, 90세까지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은 심각한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다. 연구 인력도 갈수록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실력 있는 연구자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연구할 공간과 기회를 뺏긴다면 한국 과학기술계에나 본인에게나 모두 비극일 수밖에 없다. 21대 국회가 중요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문을 닫은 모습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