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어린 시절 나는 달리기 선수였다. 주전자로 마른 목을 축이며 텅 빈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심장이 용수철처럼 튕겨 나왔으나, 성장판이 열린 날쌘 친구들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넘치는 승부욕을 어쩌지 못하던 나는, 마지막 계주에서 뒤처진 채 꺼이꺼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인생의 어느 곳을 뛰고 있을까.남녀노소 불문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도심과 트랙을 달리고 있다. 족저근막염이나 슬개골 마모로 통증을 호소하다가도, 나을만하면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두 발을 동력 삼아 심박수를 올리...
공주에 갔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도시에 기차를 타고 갔다. 풀꽃문학관에 있는 나태주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종이책이 고전하는 시대, 몰락한 귀족처럼 시인의 설 자리조차 좁아지는 시대에, 나태주라는 이름이 지닌 ‘번식력’이 놀랍고 희귀해서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2012년 광화문 교보 빌딩에 걸린 시 ‘풀꽃’은 그가 교장 하던 시절에 아이들을 보며 쓴 시다. 풀꽃이 거름이 되어, 청년들이 모여 사는 SNS 들판에 몇 년간 내내 나태주의 시꽃이 무성하게 피어났다. 40권...
한 여름 저녁에 영화 ‘달콤한 인생’을 다시 보는 건 이병헌의 목소리와 음악 때문이다. 인생은 달콤한가, 씁쓸한가. 아름다운가, 슬픈가. 나는 약한가, 강한가. 다정한가, 잔인한가. 쏟아지는 물음표를 음표에 쓸어 담은 채 유키 구라모토는 피아노 건반 위를 유유히 나아간다. “삶엔 그 모든 속성이 다 있어요.” 손가락으로 속삭이듯. 36개 언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콰이어트’로 내향인의 저력을 입증했던 수전 케인이 달콤씁쓸함의 가치를 담은 책 ‘비터스위트’로 돌아왔다. 갈피마다 그동안 우리가 부정적으로 여겨...
통찰력있는 지식인은 우리가 산발적으로 느끼고 있던 세상의 변화를 선명한 언어로 정돈해주고, 더 나은 룰이 있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세계적인 경영저술가 사이먼 시넥은 ‘인피니트 게임’에서 본격적으로 이 세계의 룰이 바뀌었다고 선언한다. 승자도 패자도 결승점도 없는 무한게임으로의 진입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1등, 최고, 숫자를 목표로 달리며 ‘이기는 게임’이 진리라고 말하는 세상을 살았다. 그러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세트장처럼 시야가 좁은 유한게임 세상에선 1등도 꼴등도 불안에 떤다. 성과는...
지난달 빌 게이츠가 ‘넥스트 팬데믹을 대비하는 법’을 출간한 후,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 전화 통화를 했을 때, 국내 언론은 주요 뉴스 헤드라인으로 그 일을 다뤘다. 대부호인 그가 책을 더 팔고 싶어서 하는 행동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가 문제를 푸는 방식 중 중요한 루트는 책이었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관련된 책을 싸 들고 그만의 숲속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며칠씩 머무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스웨덴의 의사이자 통계학자인 한스 로슬링의 책 ‘팩트풀니스(보건과 교육 데이터를 근거로 이 세계의 진...
“나를 키운 8할은 친구였다”는 말은 청년 시절 나의 단골 멘트였다. 험난한 가정사 덕에 일찍 가슴에 바람구멍이 뚫린 나에게, 친구는 안전한 병풍이었고 신나는 유원지였다. 첫 등교, 첫 출근, 낯선 여행지에서조차 순진한 동류를 찾아내는 생존본능, 곧잘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거절하지 않는 결핍의 기질 덕에 생의 고비마다 지금까지 넘치도록 우정의 수혜자로 살았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나 ‘슬기로운 의사생활’ 심지어 영화 ‘탑건;매버릭’을 볼 때도 내 눈에 잡히는 부러운 것은 죄다 훈훈하고 인심 좋은...
영화 ‘조커’의 고담시는 뉴욕을 닮았다.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요!(아서)” “아무도 당신같은 사람에게 관심없어요!(심리상담사).” 아픈 남자 아서 플렉스는 7개의 알약을 삼키며 분열된 자아를 통제하며 살아가다 마침내 병든 도시의 빌런 ‘조커’가 된다. 다행히 현실의 뉴욕에는 귀 밝은 정신과 의사가 산다. 예일대 정신과 나종호 교수는 8만 명의 노숙자가 사는 뉴욕의 정신과 응급실에서 수련의로 일한 경험을 책으로 썼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은 한 정신과 의사의 해맑은 확대경으로 뉴욕이라는 대...
여름이 오고 있다. 올여름엔 그린란드 북동부에 가서 북극 사냥꾼들과 개 썰매 좀 타고 달려볼까, 싶다. 그곳에는 코로나바이러스나 원숭이 두창 같은 건 없을 것이다. 눈 위에 대 자로 뻗어 마스크 없이 뻥 뚫린 눈과 코로 얼어붙은 공기와 흐린 하늘을 흠뻑 빨아들이면 기분이 끝내주겠지. 극야의 어둠 속에 동면 같은 평화를 누리다, 눈 뜨면 휘몰아치는 북극성과 마주치겠지.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북극만큼 외롭고 웃기고 잡일 많고 소란스럽고 황당한 곳이 없다. 북극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을 읽어보...
전철 타고 신도림동 친구 집에 간다던 팔순의 아버지는 밤늦도록 경기도 어딘가를 배회했다. 애가 타서 전화할 때마다 다른 방향 전철을 갈아타고 점점 멀어져 갔다. 제발 택시를 타고 오라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자정이 다 돼서 5시간 만에 기적처럼 돌아온 당신의 손을 붙잡고, 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다. 치매였다. 군데군데 하얗게 번진 염증과 가장자리 빈터가 선명한 아버지의 뇌를 보며 나는 순환선과 국철을 갈아타며 돌고 돌던 그 밤의 정처 없음과 공황에 가슴이 미어졌다. 친구들 부모님 중 다섯에 네 명이 치매니, 호...
‘절실한 인간일수록 자신의 일그러진 부분과 잔혹하게 대결하면서 또는 어루만지고 돌보면서 인생의 국면을 돌파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당신이 지닌 소수자성 즉 약점이나 콤플렉스는 극복이 아니라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사와다 도모히로의 ’마이너리티 디자인’ 중에서. 그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카피라이터였다. 재능도 있어 시부야역에 그의 광고 카피가 도배 되기도 했다. 보람찬 날들이 계속될 줄 알았지만, 아들이 생후 3개월 만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간 머릿속 불이 꺼지고 세상이 캄캄해졌다...
최근에 인터뷰한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는 “할 일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고, 기대할 것이 있는 상태”를 행복으로 정의했다. 그는 인생 후반부에 대기업 임원에서 교수로, 작가로 직업을 바꿀수록 즐거움은 커지는 대신 소득은 줄더라고 했다. 검소한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의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말라’고 충고했다.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고, 원치 않는 일을 계속하면, 영혼이 망가진다고. 영국의 경영사상가에게 들은 인문학적 충고를 미국의 경제학 석학이 통계와 도표로 증명해 냈다. 97세의 행복통계학자...
“왜 아이들에게 기계와 경쟁하라고 가르칠까? 기계와 인간 존재 방식이 다르다. 기계는 일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DQ 디지털 지능’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끝나가지만, 디지털 팬데믹은 이제 시작이다. 집집마다 게임에 빠진 아이와 부모가 벌이는 언쟁의 수위가 높아지고, 아이들은 골방에서 온라인 괴롭힘의 가해자, 피해자 혹은 방관자가 되어간다. 하버드대 수리통계학 박사이자 DQ연구소 대표인 박유현의 연구에 따르면, 8~12세 아이 중 60%가 폭력 음란 영상, 게임, 소셜미디어 과몰입,...
알고보면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재난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여러분처럼 나도 따끈한 목욕물, 여름날의 수영장 같은 안락한 일상에 머물길 원했지만, 삶은 늘 그렇듯 굽이치는 파도와 비바람 앞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가 쓴 ‘최선의 고통’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그 최전선의 고난에 몸을 던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가르치는 책이다. 내가 못나거나 불운해서가 아니라, 더 진실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추구하는 인생 여정에서 고통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마조히스트의 심리...
어느 날 당신 책상 앞에 고소장이 날라와 있다. 보낸 사람은 미래 세대다. 후손들이 미래의 법정에 당신을 소환해서 하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할머니는 왜 그때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서 지금의 나에게 유전병을 물려주었나요?” “억만장자 2,047명이 전 세계 극빈층의 가난을 일곱 번이나 끝낼 수 있었다는데, 안 그런 이유가 뭔가요?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의 교수’이자 ‘TED가 가장 사랑한 미래학자’로 꼽힌 후안 엔리케스는 괴물 같은 지성으로 기술과 도덕의 충돌을 분해한 후 구체적이고 담대한 ...
“일하는 것은 본래 창조적인 것이다. 참치 손질, 옷의 수선, 가봉, 옷을 자동차에 싣고 다니는 영업, 심지어 한 벌도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때조차 창조적인 일이다. 창조의 씨앗은 실패하는 것, 잘 못 하는 것,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싹을 틔울 수 있다. 나는 그랬다.”-‘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 중에서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격조 높은 미의식을 보여주는 일본 브랜드가 있다. 미나 페르호넨. 밝고 거침없는 핀란드 마리메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 텍스타일 리빙 기업의 창업자 미나가와 아키라가 ‘살아가다 ...
우리는 누구나 탁월함을 갈망한다. 탁월한 존재만이 대체되지 않고 탁월한 사람만이 박수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오래도록 탁월함을 지향했다. 나에게 탁월함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완성도, 높고 안정된 경지를 의미했다. 드높은 이상과는 달리 나는 오랜 세월 외다리로 선 홍학처럼, 머리에 김이 나는 붉은 얼굴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지나치게 애를 썼다. 일종의 탁월함 연기랄까. 그러다 한번 심하게 고꾸라진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포즈였는지 깨달았다. 탁월함은 곡예도 아니고 우월감...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만약 할 수 있다면 장례식장에서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임종 감독 송길원 목사(하이패밀리 대표)는 망자를 대신해서 전한다. “아니, 왜 꽃을 줬다 뺐나?” 고인의 몸은 없고 영정 사진만 있는 비대면 장례식의 제단에 조문객들은 국화를 올린다. 제단 위의 꽃은 얼마 뒤 내려오고, 다음 사람이 다시 들어 올린다. 고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줬다 뺏었다 하는 셈. 대형 병원과 상조회사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 이란 말로, 고민 없이 단일화 시킨 장례 절차에는 ‘고인의 생애와 애도’가 끼어들 틈이...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찰스 핸디가 손주들을 위해 쓴 이 자애롭고 ‘공적인’ 서간문을 책으로 읽게 된 건 행운이었다. 내가 ‘황홀’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우리는 복식 호흡을 위해 인류 보편의 지식인 ‘고전’을 읽고, 피부 호흡을 위해 당대의 날 것인 ‘에세이’를 취한다. 탁월한 베스트셀러를 읽으면… 양쪽의 언어를 동시에 섭취한 것처럼 산뜻한 포만감이 느껴진다. 찰스 핸디의 책이 그랬다. 그가 쓰는 언어는 활어처럼 펄떡이면서도 심해의 깊은 폐활량이 느껴진다. 질문의 화살촉이 너른 시간...
두 개의 무인도가 있다. 1628년 선원 코르넬리스는 바타비아호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버컨섬에 표류했다. 그는 한정된 자원을 통제하기 위해 섬에서 권력과 위계를 만들었다. 위험인물은 하나씩 제거했다. 처형은 코리넬리스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는 배에서 가져온 고급 의복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드러냈다. 다른 이들은 흙투성이 누더기를 입은 채 살해당할 차례를 기다렸다. 1965년 아타섬에는 여섯 명의 기숙학교 소년들이 표류했다. 그들은 협업을 통해 생활을 개선해갔다. 모든 작업은 분담했다. 리더는 없었다. 고함치며...
이제 웃음은 ‘공공의 선’이다. 악랄하게 웃기면 웃으면서도 죄책감이 든다. 송은이는 영리하다. 그는 혼자 웃는 대신 함께 웃는 것을 택했다. 기울어가는 코미디업계에서 ‘혼자 살겠다고 바둥대는 대신’ 겁 없이 판 벌이고, 반짝이는 후배들을 불러모았다. 방송국이라는 거대 비행장에서 팟캐스트로, 유튜브로, 웹예능으로 미디어를 가볍게 바꿔 타면서 송은이는 언제든 스스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달았다. 매일 먹는 밥처럼, 모여 사는 친구처럼, 송은이가 계속 웃기고 꿈꿔도 또 재미난 작당모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놀라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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