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반도체 업계가 불황 터널에 갇혔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쇼크’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수요는 쉽게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 반도체 기업들은 투자를 보류하고 고강도 구조조정에 돌입했으나 상황은 악화일로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 미국 전력반도체 기업 울프스피드의 주가가 하루 만에 52% 급락하는가 하면 일본 차량용 반도체 기업 르네사스는 구조조정에 더해 임금 동결을 선언했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울프스피드는 트럼프 행정부에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보조금 지급을 촉구하고 나섰다. 앞서 울프스피드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제정된 반도체법을 통해 약 7억5000만달러(약 1조원)를 지원받기로 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반도체법을 “끔찍한 법”이라고 비난하며 폐기 의사를 보이고 있다. 시장에서는 울프스피드가 이 보조금을 받지 못할 경우 회사가 유동성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코로나19 특수 당시 100달러를 호가하던 울프스피드 주가는 잇따른 악재에 지난 28일 하루에만 52% 급락해 2.59달러를 기록했다. 당장 내년 만기인 5억7500만달러(약 85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 상환을 위한 자금 조달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독일 정부로부터 보조금 5억유로(약 8000억원)를 받아 진행하기로 했던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도 무기한 보류됐다. 독일 자동차부품업체 ZF프리드리히스하펜과 함께 27억5000만유로(약 4조4000억원)를 들여 2027년부터 독일 공장에서 전기차 핵심 부품인 실리콘카바이드(SiC) 전력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기차 시장 침체를 이유로 신규 투자를 동결한 상태다.
독일 인피니언, 일본 르네사스, 스위스 ST마이크로, 네덜란드 NXP 등 차량용 반도체 ‘빅5′의 상황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일찌감치 구조조정에 돌입한 서구 전력반도체 업체들에 이어 일본 반도체 부활의 선두주자로 꼽히던 르네사스도 고강도 구조조정과 임금 동결을 선언했다. 지난 26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시바타 히데토시 르네사스 최고경영자(CEO)는 “광범위한 비용 절감 조치를 시행했지만, 인력 감축은 피할 수 없다”며 “장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고강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며, 이는 전략적 판단이 아닌 생존을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시바타 히데토시 CEO는 업황이 쉽게 반등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자동차 및 산업용 반도체 시장이 여전히 침체 상태에 있다”며 “바닥은 찍은 것으로 보이지만 불행하게도 뚜렷한 회복 조짐은 없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 특수에 힘입어 2023년부터 지난해 중순까지 르네사스는 일본 증시에서 가장 많이 오른 종목 중 하나(170%)였으나, 업황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면서 9개월 만에 주가는 고점 대비 38% 넘게 하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외국산 자동차 관세 폭탄은 업계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내달 3일부터는 미국에서 제조되지 않은 자동차와 자동차 핵심부품에 25%의 품목 관세가 붙고, 여기에 더해 국가별 상호 관세가 추가된다. 고율 관세로 자동차 및 부품의 제조 비용이 상승하면 자동차 기업들이 반도체 주문을 줄이거나 대체 공급망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달부터 발표된 미국발 추가 관세에 대응해 내수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더욱 강화하고 자국산 반도체를 채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전기차 시장 성장이 예상보다 급격하게 둔화하고 있어 전력반도체 업황 부진은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라며 “유일한 희망으로 꼽히던 중국 시장에서는 작년부터 큰손 전기차 업체인 BYD 등이 자체적으로 전력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고 있어 돌파구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장조사업체 마크라인즈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9% 늘어난 약 1137만대에 불과했다. 판매량이 증가하기는 했으나 증가율은 2022년 75%, 2023년 30%로 크게 하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