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만한 양자 컴퓨터가 나오려면 20년은 걸릴 것이다.”
1월 7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 박람회 CES 2025에서 나온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한마디에 ‘현금 복사기’ 로 불릴 만큼 잘나가던 양자 컴퓨터 관련 주식은 일제히 폭락했다.
이튿날인 1월 8일 뉴욕 증시에서 퀀텀컴퓨팅은 43%, 리게티컴퓨팅은 45%, 아이온큐는 39% 하락했다. 심지어 퀀텀시텍과 액셀링크 등 중국 증시에 상장된 관련 기업 주가도 급락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절대 강자 엔비디아와 그 수장인 젠슨 황의 막강한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최근의 일화다. 엔비디아는 자사 제품 위에서만 구동하는 AI 개발 플랫폼 ‘쿠다(CUDA)’를 기반으로 세계 AI 칩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 있는 미국 체인 레스토랑 ‘데니스’에 젠슨 황과 IBM 출신 커티스 프리엠, 휴렛팩커드(HP) 출신 크리스 말라코스키가 모인 것이 엔비디아의 시작이다. 새너제이의 데니스는 젠슨 황이 15세 때 접시 닦이로 일했던 곳이다. 이들은 24시간 문 여는 이 식당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열 번이나 리필하며 PC에 사실적인 3D 그래픽을 구현해 줄 칩 사업을 구상했다.
1963년 대만 남부 타이난에서 태어나 9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젠슨 황은 오리건주립대와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미국 반도체 기업 LSI로지스틱스와 AMD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를 담당하다가 창업했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지금 엔비디아는 애플에 이어 시가총액(시총) 전 세계 2위 기업으로 우뚝 섰다. 엔비디아 주가는 2024년 한 해 동안만 171% 급등했다. 1월 14일 종가 기준 엔비디아의 시총은 3조2300억달러(약 4758조7590억원)에 이른다. 같은 날 애플 시총은 3조5100억달러였다. 1999년 1월 22일 뉴욕 증시 나스닥 상장 당시 엔비디아 주가는 12달러였다. 1월 14일 종가 기준으로는 주당 131.76달러다. 지금까지 네 차례의 액면 분할로 초기 한 주가 현재 240주로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상장 직후 구입한 엔비디아 주식 한 주를 계속 보유하고 있을 경우 그 가치는 3만1622.4달러(약 4660만원)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26년 사이에 2600배 넘게 가치가 올랐다는 얘기다. 주가 급등에 힘입어 젠슨 황은 세계 10대 부자 반열에 올랐다. 1월 14일 기준 ‘포브스’ 추정 그의 보유 자산 가치는 1151억달러(약 169조5768억원)다.
챗GPT를 비롯한 생성 AI(Generative AI)의 급부상이 엔비디아 급성장의 주된 원동력인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젠슨 황 본인은 2019년 미국 CBS 방송 출연 당시 성공 비결에 대해 “마법은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육십 평생 열심히 일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기회는 올 때 잡아야 하고, 묵묵히 성실하게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AI 칩 시장의 절대 강자 엔비디아가 지난 32년 동안 이룩한 기념비적인 성공 비결을 분석했다.
성공 비결 1│
기술의 흐름을 읽는 안목, 그리고 뚝심
누구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흐름과 방향을 가늠할 수는 있다. 젠슨 황이라고 해서 ‘AI 시대의 도래’를 오늘날 같은 모습으로 내다본 건 아니었다. 그는 2023년 NBC 인터뷰에서 “AI 성공을 내다봤는가”란 질문을 받고 “컴퓨팅 속도 개선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대량의 데이터 처리 속도가 중요한 시대가 올 것으로 확신한 젠슨 황과 동료들은 그래픽처리장치(GPU) 성능을 꾸준히 높이며 뚝심 있게 사업을 이어 나갔다. 뚝심은 확신의 깊이에 비례해 강해진다. 막대한 투자금을 들여 개발한 AI 개발 플랫폼 쿠다는 2006년 출시됐을 때만 해도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 주가가 하락하고 주주가 거세게 압박했지만, 젠슨 황은 꿋꿋이 버텨 냈다. 엔비디아의 AI 딥 러닝 관련 연구 부문 부사장인 브라이언 카탄자로는 2023년 CNBC 인터뷰에서 엔비디아에 합류한 2008년 당시를 떠올리며 “월가 투자자들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것(쿠다 등 AI 관련 기술)에 왜 돈을 쏟아붓는지 의문을 제기했다”고 회고했다. 2017년 암호화폐 열풍이 불고, 채굴에 GPU가 사용되면서부터 시장은 엔비디아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2022년 불어닥친 생성 AI 열풍은 엔비디아의 성장에 날개를 달아줬다.
성공 비결 2│
압도적인 쿠다 생태계의 ‘록인 효과’
“AI 반도체 관련 인재를 뽑으면 모두가 ‘엔비디아 GPU’와 쿠다를 쓰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박정호 전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재임 중이던 2023년 2월 15일 한림대 도헌학술원 개원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밝힌 내용의 일부다. 쿠다는 컴퓨팅 속도 가속에 관한 젠슨 황의 확신이 오랜 시간 시장의 피드백을 받으며 진화를 거듭한 결과물이다. 상당수의 AI 개발자가 10년 넘게 쿠다를 활용해 프로그래밍하다 보니 그동안 상당한 분량의 ‘코드’가 축적됐다. 이는 다시 개발자에게 ‘레퍼런스(참고 자료)’가 된다. 더구나 쿠다로 만든 프로그램은 엔비디아의 GPU에서만 돌아간다. ‘쿠다 생태계’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AI 반도체도 엔비디아 GPU를 쓸 수밖에 없다. 이른바 ‘록인(lock-in) 효과’다. 록인 효과란 고객이 상품·서비스를 이용하고 나면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로 ‘이용의 이전’을 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플랫폼 서비스에서 록인 효과는 서비스 성패를 가르는 ‘키포인트’ 중 하나다.
성공 비결 3│
과업 중심 문화와 폭넓은 소통
직장인에게 ‘인간 중심의(people-orient-ed) 기업 문화’만큼 듣기 좋은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직원 3만 명에 육박하는 엔비디아같은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리더 입장에서는 부담이 큰 접근법일 수 있다. 직원 이름을 외우고 생일을 챙기는 것보다는 계획에서 성과에 이르는 업무의 주요 단계를 꼼꼼히 챙기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엔비디아가 과업 중심의(task-oriented) 기업 문화를 지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젠슨 황은 대신 업무를 매개로 직원과 폭넓게 소통한다. 최첨단 테크 기업인 엔비디아가 업무 소통에 이메일을 널리 활용하는 게 이채롭다. 엔비디아에서는 전 직원이 1~2주에 한 번 직속 팀과 임원에게 ‘톱 5 이메일’을 보낸다. 여기에는 ‘작업 관련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과 ‘최근 시장 동향’을 담아야 한다. 수신자엔 젠슨 황이 포함된다. 메일을 보낸 지 몇 분 만에 젠슨 황이 답장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엔비디아엔 CEO와 정기적으로 회의하는 직속 보고자가 60명이 넘는다. 보통의 미국 대기업에서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공 비결 4│
실질적이고 신속한 보상
엔비디아에서 야근과 주말 근무는 흔한 풍경이다. 엔지니어 아닌 마케팅 담당자도 주 60시간 이상 근무가 많다. 기업 문화가 업무 중심으로 흘러가다 보니 칭찬에도 인색하다. 그런데도 엔비디아 이직률은 3% 미만으로 매우 낮다. 업무와 성과에 그만한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에선 철저한 성과 기반으로 신속한 보상이 이뤄진다. 연간 성과 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받거나 ‘특별 기여자’로 선정되면, 주식을 몇백 주 받기도 한다. 언제든 훌륭한 일을 해내면 젠슨 황이 바로 연락해서 주식을 주는 경우도 있다. 엔비디아 주가가 워낙 빠른 속도로 오르다 보니, 주식 지급은 인재를 회사에 오래 머물게 하는 강력한 인센티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