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반도체 기업 사상 최초로 시총 1조달러(약 1320조원)를 찍은 가운데 대만을 방문 중인 젠슨 황(60)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현지에서 슈퍼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 대만 이민자 출신인 황 CEO는 대만어로 연설을 하고 야시장을 찾는 등 고국에 애정을 보이면서 대만인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화제몰이를 한 그는 ‘인공지능(AI)의 대부’ ‘1조달러의 사나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황 CEO는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2일까지 대만 타이페이에서 열리는 동북아 최대 정보기술(IT) 박람회 ‘컴퓨텍스’에 참석하기 위해 2주 일정으로 대만을 방문 중이다. 그는 개막식 전날부터 나흘 연속 박람회에 모습을 보이며 현지 사람들과 격의 없이 소통을 이어갔다. 깜짝 게스트로 무대에 등장하거나 협력사 부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팬들의 ‘셀카’ 요청에도 흔쾌히 응했다. 공식 일정 외에는 경호원 없이 따로 타이페이 라오허제 야시장을 찾아 대만식 꽈배기인 마후아 등 현지 음식을 사러 다녔다.
대만 연합보는 “젠슨 황은 대만에 와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며 “그는 대만에서 모든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매우 편안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대만인들의 새로운 아이콘이 됐다”고 전했다. 현지 언론과 네티즌들은 황 CEO가 항상 입고 다니는 검정 가죽 재킷부터 그가 방문한 현지 식당과 먹은 음식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했다. 황 CEO는 어린 시절 대만과 태국에서 지내다가 10살 때인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1993년 엔비디아를 창업했다. 현재 엔비디아는 고성능 GPU(그래픽처리장치)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황 CEO의 대만 여정은 지난달 27일 국립대만대 졸업식 축사로 시작됐다. ‘목표를 향해 걷지 말고 뛰어라(Run, don’t walk)’를 주제로 졸업생 1만여명에게 전한 축사에서 그는 엔비디아가 초창기 파산 직전까지 갔다 살아난 얘기를 꺼내며 겸손을 강조했다. 그는 “굴욕적이고 부끄러운 일이 많았지만, 실수를 직시하고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회사를 구했다”며 “실수를 인정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통과 아픔을 견디고, 목적이 있는 삶에 헌신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PC와 칩 혁명에 나섰던 것처럼 여러분은 AI 혁명에 참여하라”며 “걷지 말고 뛰어 AI 혁명의 기회를 잡으라”라고 했다.
이틀 뒤인 29일 황 CEO는 컴퓨텍스 기조연설 무대에 올라 2시간 동안 발표를 이어갔다. 그는 지난 4년간 코로나19 유행으로 이런 발표를 할 수 없었다면서 회사가 세상에 보여줄 게 많다고 강조했다. AI 슈퍼컴퓨터 플랫폼부터 로봇 시스템 등 다양한 AI 기반 신제품을 공개한 그는 “AI가 적용되는 분야는 모든 제조업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했다. 긴 발표가 끝나갈 즈음 그는 “(오늘 전한 내용이) 너무 많다는 걸 나도 안다”고 말하며 청중들의 웃음을 끌어냈다.
컴퓨텍스 개막일인 지난달 30일부터는 전시회 현장에서 현지 취재진과 만나 여러 이슈에 대해 언급하며 화제를 이어갔다. 그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미국의 중국 반도체 규제와 관련해 목소리를 냈다. 그는 “미국의 규제가 어떻든 우리는 이를 절대적으로 준수하겠지만. 내 생각에 중국은 그 기회를 활용해 자국 기업을 육성할 것”이라며 “중국에 그렇게 많은 그래픽처리장치(GPU) 스타트업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이 분야에 쏟아부은 자원의 양이 꽤 커 그들을 얕볼 수 없다”며 “엔비디아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은 경쟁력 유지를 위해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황 CEO는 앞서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도 “중국은 부품 공급뿐 아니라 최종 소비 시장으로서도 대체 불가능하다”며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반도체를 살 수 없다면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미국 정부가 대중 반도체 규제에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현재 엔비디아는 미국의 대중 수출 통제 조치로 챗 GPT 개발에 쓰인 GPU 반도체 ‘H100′ 등 일부 반도체를 중국에 팔지 못하고 있다.
황 CEO는 엔비디아 반도체 생산망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다변화 전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엔비디아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에 반도체 제작을 맡기고 있다. 지난달 31일 대만 매체 타이페이타임스에 따르면 황 CEO는 “삼성전자와도 생산할 수 있고 인텔과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인텔로부터 차세대 반도체 공정 테스트 결과를 받았는데 좋아 보였다”며 “인텔과의 협력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했다.
이 발언이 이슈가 되자 지난 1일 황 CEO는 전시회 내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의 차세대 AI 칩은 세계적 수준의 제조공정 기술과 방대한 생산능력, 놀라운 유연성을 갖춘 TSMC에서 계속 위탁 생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정학적, 정치적 위험을 줄이기 위해 TSMC의 각기 다른 제조 공정 노드에서 엔비디아의 칩을 생산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취하고 있으며, 앞으로 미국 애리조나주 TSMC 공장에서도 AI 칩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자유시보 등 현지 언론에서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칩이 삼성전자와 인텔에서 위탁 생산될 것이라는 일각의 보도를 정면으로 불식하고 TSMC에 대한 완벽한 신뢰를 보여준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는 이번주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를 비롯해 여러 대만 주요 기업 핵심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1일 황 CEO는 대만 방문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장중머우 TSMC 창업자 내외와 식사하는 것이었다면서 최근에 “창 창업자의 와이프가 직접 요리한, 매우 맛있는 집밥을 먹었다”고 말했다. 2일에는 TSMC 경영진과 류양웨이 대만 폭스콘 회장을 만날 예정이다.
황 CEO는 이번주 대만 일정이 계속 있다면서, 이후 중국 방문 가능성을 열어놨다. 앞서 블룸버그통신은 황 CEO가 이달 중 중국을 방문해 기술기업 경영진을 만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중국 주요 IT 기업인 텐센트 홀딩스와 틱톡 소유 업체인 바이트댄스, 중국 전기차 업체인 리샹과 비야디(BYD)를 비롯해 전기차 시장에 뛰어든 샤오미 측과 회동할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