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센트(약 700원)에서 10달러(약 1만3900원)에 불과한 저가 반도체 수급난으로 초미세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가 고부가가치 제품인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에 주력하는 사이 생산량 변동이 없는 저가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공급 부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웨이저자 대만 TSMC 최고경영자(CEO)는 8월 말 대만에서 열린 TSMC 기술 연례포럼에서 “10달러 미만의 저가 반도체가 6000억달러(약 836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둔화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했다. 웨이저자 CEO의 이런 발언은 EUV 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드는 네덜란드 ASML이 최근 28㎚ 반도체가 부족해 장비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TSMC는 ASML의 가장 큰 고객사 중 하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0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마틴 반 덴 브링크(Martin van den Brink) ASML CTO,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 피터 버닝크(Peter Wennink) ASML CEO /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초미세공정의 성패는 ASML EUV 수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UV는 반도체 웨이퍼 위에 아주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장비인데, 미세회로는 반도체 성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벌 선두권의 업체들은 모두 이 ASML EUV 장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웨이저자 TSMC CEO, 펫 겔싱어 인텔 CEO 등이 직접 네덜란드로 날아가 장비를 달라고 읍소할 정도다. 파운드리는 물론, 메모리반도체 미세공정에도 이 장비가 필수라고 한다.

10㎚ 이하 미세공정 반도체는 모바일 칩(AP), 인공지능(AI), 고성능컴퓨팅(HPC) 등에 쓰인다. 반면 저가 반도체는 정보기술(IT) 기기나 자동차에 사용되는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전력관리반도체(PMIC) 등에 사용된다. 산업용 제어 칩도 저가 반도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술은 10㎚ 이하 반도체가 이끌지만, 반도체 산업의 허리는 저가 반도체가 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28㎚ 이상 반도체는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해 전 세계적인 공급난이 발생했다. ASML의 장비 생산 차질도 이에 기인한다. EUV 장비뿐 아니라, 다른 반도체 장비 생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ASML, 미국 램리서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등의 장비 리드타임(주문에서 생산, 공급에 걸리는 시간)은 최근 18개월에서 30개월로 늘었다. 이는 올해 초 12~18개월보다 상황이 악화한 것이다. 코로나19 이전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은 3~6개월 수준이었다.

TSMC에서 생산하고 있는 8인치 웨이퍼. /TSMC 제공

저가 반도체는 수량을 갑자기 늘리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은 기기나 장비에 따라 생산 조건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MCU, PMIC 등은 주로 8인치(200㎜) 웨이퍼(반도체 원판)로 만들어지는데, 워낙 구형 공정이어서 핵심 설비들이 대부분 단종된 상태다. 공급이 어렵다 보니, 공급 단가도 꾸준히 오르는 중이다. 구형 공정 파운드리들은 올해 공급 단가를 10~20% 올리기로 했다.

수요도 쉽게 떨어지지 않고 있어 문제다. 미국 IT 컨설팅 업체 IBS에 따르면 저가 반도체 수요는 2030년까지 281억달러로 10년 전과 비교해 3배 이상 증가한다. 지속적인 공급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저가 반도체의 생산 중심은 중국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크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중국은 2021~2024년 4년 간 주요 생산공장 31곳을 건설한다. 같은 기간 대만(19곳)과 미국(12곳)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IBS는 중국이 2025년 전 세계 28㎚ 반도체의 40%를 담당할 것으로 전망한다. 중국 파운드리인 SMIC는 상하이와 톈진에 28㎚ 반도체 공장을 각각 짓는데 89억달러(약 12조4000억원), 75억달러(약 10조4500억원)를 투자한다. 업계 관계자는 “첨단 반도체 기술은 한국과 대만, 미국 등에 크게 뒤진 만큼 중하위 기술 역량을 키우겠다는 게 중국의 의도로 볼 수 있다”라며 “다만 중국에 반도체 장비 판매를 금지하는 미국의 반도체법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