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대다수가 높은 물가와 끈질긴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 속에서 지출을 줄이는 가운데, 부유층의 소비는 거침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상위 10% 부유층이 인플레이션을 뛰어넘는 소비를 하며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에르메스 쇼핑백들. /로이터

◇ 美 소비, 상위 10%가 절반 차지

23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연소득 25만 달러(약 3억5780만원) 이상인 상위 10% 가구가 휴가부터 명품 가방까지 아낌없이 지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2023년 9월부터 2024년 9월까지 상위 10% 소득 계층의 소비는 12%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중산층과 노동 계층의 소비는 감소했다.

무디스 애널리틱스 분석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가 미국 전체 소비의 49.7%를 차지하는데, 이는 1989년 이후 최고치다. 30년 전만 해도 이들이 미국 소비에서 자치하는 비중은 36%에 불과했다.

부유층의 소비 증가율은 물가 상승을 훨씬 웃돌았다. 지난 4년간 하위 80% 계층의 소비는 25% 증가했으나, 같은 기간 물가가 21% 상승해 실질적인 소비 여력은 크지 않았다. 반면, 상위 10%는 무려 58% 더 소비했다.

특히 최상위 5% 가구의 해외 명품 소비는 전년 대비 10% 이상 증가했다. 데이비드 틴슬리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들은 파리에 가서 명품 가방, 신발, 옷을 한가득 사 온다”라고 말했다.

◇ 美 경제, 부유층 소비에 유례없는 의존

이처럼 미국 경제는 부유층의 소비에 이례적으로 의존하는 구조가 됐다고 WSJ은 분석했다. 마크 잔디 무디스 애널리틱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상위 10%의 소비가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부유층의 재정 상태는 그 어느때보다 좋고, 소비력도 강력하다”면서 “미국 경제는 점점 더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부유층의 소비력은 부동산과 주식시장 상승에 기인한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 상승은 경기 호황의 신호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자산을 보유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간 격차를 더 벌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소비 격차가 더욱 확대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데이터에 따르면 상위 20%의 순자산은 2019년 말 이후 35조 달러(약 5경95조원), 45% 증가했다. 반면, 하위 80%의 순자산도 비슷한 증가율을 보였지만, 절대 금액은 14조 달러(약 2경 38조원)에 불과했다.

WSJ은 “부유층 소비가 경제를 지탱하는 상황에서 주식시장 폭락이나 부동상 가치 하락으로 이들의 소비를 줄면 경제에도 큰 타격이 예상된다”면서 “최근에는 관세 인상 가능성 등으로 부유층을 포함한 소비자들의 심리도 다소 위축되는 모습”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