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의 고급 부동산 시장이 예상 밖의 호황을 맞고 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제 제재로 인해 해외에서 자금 운용이 어려워진 러시아 부유층들이 자국 부동산을 안전한 피난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3일(현지 시각) 블룸버그는 모스크바 부동산이 런던, 홍콩 등 글로벌 주요 도시들이 부동산 경기 둔화를 겪고 있는 것과 달리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부동산 컨설팅업체 NF 그룹(옛 나이트 프랭크 러시아)에 따르면 지난해 모스크바에서 ㎡당 195만 루블(2822만원) 이상인 고급 아파트 매매 건수는 40% 가까이 증가했으며, 가격도 21% 상승해 파리와 런던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예카테리나 루먀체바 칼린카 에코시스템 창립자는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이제 누구나 가장 안전한 자산 보관 장소는 자국임을 깨닫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제 금융 제재가 강화되면서 러시아 부자들은 해외 자산 투자가 어려워졌고, 그 결과 자금이 모스크바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등한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도 부동산 투자 열풍을 부채질하는 요인 중 하나다. 전쟁 이후 러시아의 물가 상승률은 급격히 치솟았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기록적인 수준으로 인상했다. 하지만 루블 가치는 지난해에만 약 25% 하락하면서 변동성이 커졌고, 이에 따라 러시아 부유층들은 부동산을 인플레이션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NF 그룹의 파트너 안드레이 솔로비예프는 “러시아 부자들은 자산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며 “특히 변동성이 큰 루블보다는 안전한 부동산에 자금을 투입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라고 말했다.
고급 부동산 수요가 증가하면서 모스크바 곳곳에서는 고급 아파트 및 빌라 개발 프로젝트가 잇달아 추진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모스크바 중심부의 ‘레벤손 프로젝트’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세기 초 건축가 표도르 셰흐텔이 설계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저택을 개조한 것으로, 최고급 주거 단지로 탈바꿈했다. 이곳에서 지난해 가장 비싸게 거래된 부동산은 약 38억1000만 루블(약 574억원)에 달했다.
모스크바의 부동산 시장이 호황을 누리는 것과 달리, 전통적으로 러시아 부자들이 선호하던 글로벌 도시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러시아 재벌들이 대거 몰려 ‘런던그라드(Londongrad)’라는 별명을 얻었던 런던의 고급 부동산 시장은 지난해 부진했고, 올해도 하락세가 예상된다. 한때 러시아 부유층의 선호 지역이었던 두바이에서도 이들의 존재감이 약해지고 있다. 2022년 두바이 부동산 구매자 1위를 기록했던 러시아 국적자들은 지난해 9위로 밀려났다고 블룸버그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