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현지 시각)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지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에는 각국의 국가원수, 국왕들이 대거 모여 ‘세기(世紀)의 조문 외교’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BBC와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12일까지 최소 10여 명의 국가원수급 지도자들이 여왕의 국장(國葬) 참석을 확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사실상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서 왕이나 여왕, 총리 또는 대통령을 장례식에 보낼 것”이라며 “경호 대상만 2000여 명으로 영국에서 가장 큰 경호 작전이 시작될 것”으로 내다봤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 의사를 밝혔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도 “가능한 한 참석하겠다”고 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 등 유럽연합(EU) 주요 국가원수들도 런던에 올 것으로 보인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를 비롯해 56개 영연방 국가에서도 총리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전망이다. 나루히토 일왕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조문을 추진 중이다. 이 밖에 스페인·벨기에·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 등 유럽 내 입헌군주국과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중동 왕실의 참석이 예상된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간소하게 치러진 지난해 4월 필립공 장례식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진행된 영국 왕실 행사는 2011년 4월 윌리엄 왕세자와 캐서린 왕세자빈 결혼식이었다. 이때에도 왕족과 영연방 총리 등을 제외하면 국가원수급 외빈은 거의 없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이 특별히 주목을 받는 건 역사적인 의미 때문이기도 하다. 여왕은 1952년 냉전 본격화와 동시에 왕위에 올랐다. 그 후 70년간 영국과 영연방을 중심으로 서방의 전통과 이념을 대표하는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주간 옵세르바퇴르는 “냉전의 끝을 알렸던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의 사망에 이어, 냉전과 함께 영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가 무너져 가는 것을 목도한 엘리자베스 여왕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냉전과 탈냉전, 미·소 양강 체제의 성립과 붕괴, 여왕의 서거에 미국에 의한 단극(單極) 시대와 테러리즘의 발호 등으로 숨 가쁘게 흘러온 현대사가 일단락 됐다는 상징성도 있다는 것.
한편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확연히 둘로 쪼개진 세계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장으로 확연히 부각될 전망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일찌감치 장례식 불참을 선언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장례식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아 불참이 예상된다. 중국과 러시아의 시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의 유산이자, 러시아와 중국이 무너뜨리려고 하는 서방 사회 중심의 세계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남미와 중앙·동남아시아, 중동의 여러 국가는 러시아·중국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들 역시 장례식에 불참할 가능성이 크다. 여왕 장례식에 참석하는 국가 수반들의 면면이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자유민주 진영과 권위주의·독재 진영 간의 ‘전선’을 보여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