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월가에서 ‘사모 신용(Private Credit)’이 금융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전통적인 은행 대출이나 사모펀드, 헤지펀드와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사모 신용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성장하며 초부유층과 대형 기관투자자들의 거대한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 뉴욕의 월가. /로이터

블룸버그에 따르면 사모 신용 시장 규모는 현재 1조6000억 달러(약 2293조원)로, 10년 만에 3배 이상 성장했다. 2000년에는 전체 회사채 시장에서 4%를 차지하던 사모 신용의 비중이 2022년에는 20%까지 급등했다. 월가의 자금 흐름이 은행과 전통 금융기관에서 사모 신용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모 신용은 은행이 아닌 초부유층과 기관투자자들의 자금을 활용해 기업에 직접 대출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사모펀드가 기업의 지분을 인수하거나 헤지펀드가 단기적 투기 거래를 하는 것과 달리 사모 신용은 기업의 부채를 매입하거나 신규 대출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낸다. 주식이 아닌 채권 투자에 가까운 구조다.

과거 사모 신용은 금융 시장의 변두리에 있던 틈새 산업이었다. 하지만 기관 투자자들이 더 높은 수익을 찾고,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전통적인 은행 대출이 위축되면서 사모 신용은 이제 월가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가 됐다. 사모 신용은 비교적 빠르고 유연한 대출을 제공하며 기존 금융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게 됐다.

사모 신용 시장이 급성장한 이유 중 하나는 높은 수익률이다. 글로벌 금리 상승 이후 기관투자자들이 전통 채권 투자만으로는 목표 수익을 달성하기 어려워지면서, 사모 신용은 주식보다 낮은 변동성을 가지면서도 전통 채권보다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대체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다.

연기금과 대학 기부금(Endowment Funds) 같은 대형 기관투자자들은 물론, 초부유층 개인들도 적극적으로 사모 신용에 투자하고 있다. 사모 신용 펀드는 최소 투자 금액이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 개인 투자자에게는 접근이 어렵지만, 초부유층에는 독점적인 투자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은행 대출보다 빠른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어, 단기적으로 높은 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고 있다.

사모 신용 시장이 커지면서 새로운 금융 권력층도 탄생했다. 블랙록을 비롯한 세계 최대 투자사들이 잇달아 사모 신용 업체를 인수하면서 이 시장에서 성공한 인물들은 새로운 억만장자로 떠올랐다.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 따르면 사모 신용 붐의 수혜자인 18명의 억만장자의 총자산은 610억 달러(약 87조4435억원)에 달한다. 그중 금융 업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사모 신용 분야의 ‘원조’ 격인 아레스 매니지먼트의 공동 창립자인 토니 레슬러뿐이다. 블룸버그는 “20년 전 월가에서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금융 권력을 쥐고 있었다면, 이제는 사모 신용을 다루는 금융가들이 새로운 권력층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모 신용의 급성장이 금융 시스템의 새로운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사모 신용 대출의 상당수가 담보 없이 진행되며, 시장이 비공개적으로 운영돼 금융 당국의 규제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은행 대출과 달리 사모 신용 시장에는 공시 의무가 적어, 기업들의 실제 부채 부담이 얼마나 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경기 침체 시 부실 대출이 급증할 경우,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처럼 금융 시스템의 ‘뇌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