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대치 중인 러시아가 탈(脫)달러화를 통해 세계 금융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서방의 제재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1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미국과 유럽이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제재를 논의 중이지만, 달러화 의존성을 대폭 낮춘 러시아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유럽의 대(對)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는 여전히 높아 오히려 서방이 역공을 당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연합뉴스

러시아 중앙은행(RCB)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RCB의 지급준비금은 2015년 말부터 20% 이상 증가해 현재 6200억달러(약 738조 원)를 넘어섰다. 이 가운데 달러가 차지하는 비율은 2020년 6월 22.2%에서 지난해 16.4%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는 유로화와 금에 비해서도 낮은 수치다. 반면 탈달러화 파트너인 중국의 위안화 비중은 13.1%로 높아졌다.

특히 유가 급등에 힘 입은 국부펀드가 1900억 달러 수준으로 급등하면서 달러화 자산을 모두 처분했다. 러시아 정부는 국부펀드 규모가 2024년까지 30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달러 결제 비중도 크게 줄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러시아의 국제교역·금융 결제 과정에서 달러의 비중은 최대 20% 감소했다. 지난해에는 중국과 합작해 항공기 급유 시 달러 대신 자국 통화를 쓰기로 합의했다. 중국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양국 간 교역이 늘어나는 가운데 주요 상품의 자국 통화 결제가 급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외국인 투자자 의존도도 하락했다. 지난해 미국 정부가 러시아 국채 투자를 금지한 이후 러시아 국채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은 20%로 떨어졌다. 투자자는 줄었지만 러시아 경제는 오히려 미래의 외부적 충격에 대한 취약성을 덜어내게 됐다고 FT는 진단했다. 러시아 기업의 해외 금융회사 대출 규모도 2014년 3월 1500억 달러에서 지난해 800억 달러로 급감했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러시아 정부 부채가 GDP의 약 20% 수준이라며 내년 말에는 18.5%까지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1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북쪽에 있는 러시아 스몰렌스크주 옐냐에 군부대와 차량이 배치된 모습을 촬영한 맥사(MAXAR) 테크놀로지의 위성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물론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안으로 러시아 경제도 위기감이 커진 상황이다. 이날 모스크바증권거래소(MOEX) 지수는 6.5%로 2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달러 대비 루블화 가치도 0.9% 하락한 76.7루블로 9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보도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세계 경제가 연평균 3%씩 성장하는 동안 러시아의 연평균 성장률은 0.8%에 불과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나름대로 서방의 경제 제재를 견디기 위해 ‘경제적 요새화’ 작업에 속도를 내는 반면 유럽은 에너지 분야의 러시아 의존성을 전혀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천연가스 수입량의 40%, 원유 수입량의 25% 이상을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러시아가 에너지 공급 중단 등으로 보복에 나서면 상당수 유럽 국가들이 ‘에너지 대란’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현실화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벨라루스와 폴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야말-유럽 가스관 공급을 중단했다. 이에 유럽 천연가스 시세 기준치인 네덜란드 TTF의 1월 선물은 ㎿h(메가와트시)당 180유로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FT는 러시아가 서방의 압박 등 외부 요인 속에 맞서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일정 부분 경제 성장을 희생하는 ‘포스트 소련식’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