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자산 매입 축소, 즉 ‘테이퍼링’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에 따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시장에 대규모로 돈을 풀어 경제를 부양해 온 정책 기조를 끝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촉각은 미국의 금리 인상 시기로 쏠리고 있다. 이미 연준이 수 차례에 걸쳐 올해 테이퍼링을 시작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만큼, 금융 시장은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준도 테이퍼링을 선언하면서도 금리 인상에 대해서는 급하게 진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상황이다.
그러나 2년째에 걸쳐 진행된 통화완화 정책 등으로 인해 최근 물가가 급등하고 있어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금리 인상이 단행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 연준 “이달부터 매달 150억달러씩 채권매입 축소… 내년 6월 테이퍼링 종료”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3일(현지시각)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를 마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달부터 월간 자산 매입 규모를 매달 150억달러씩 줄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매달 국채는 100억달러씩, 주택저당증권(MBS)은 50억달러씩 매입 규모를 축소해 나갈 계획이다.
연준은 지난해 3월 코로나 사태로 미국 경제가 충격에 빠지고 금융 시장에 혼란이 가중되자, ‘제로(0) 금리’와 자산 매입을 통한 양적완화를 동시에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매달 국채와 MBS를 사들여 1200억달러 규모의 현금을 시장에 풀었다.
이제 이 같은 자산 매입의 규모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 나중에는 매입을 완전히 끝내겠다는 것이 연준의 계획이다.
연준은 구체적인 테이퍼링 종료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매달 150억달러씩 자산 매입 규모를 줄일 경우 산술적으로 8개월 후인 2022년 6월 테이퍼링은 끝나게 된다. 다만, 연준은 일단 이달과 12월에 각각 150억달러씩 자산 매입을 줄인 뒤 이후에는 경기 상황을 보면서 속도를 조절하기로 했다.
◇ ‘무제한 돈 풀기’ 성과 달성했다고 본 연준… 인플레 우려에 테이퍼링 결단
연준이 이달부터 테이퍼링을 시작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은 시장에 천문학적인 돈을 풀어 코로나의 타격을 이겨내겠다는 목적을 상당 부분 달성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코로나 사태 발생과 함께 강력한 방역 규제까지 시행되면서 미국의 경제지표는 크게 악화됐다. 주식 시장 역시 한 동안 큰 폭으로 하락하며 혼란한 흐름을 보였다.
그러나 2년에 걸쳐 지속된 양적완화와 제로금리 정책을 통해 추락했던 미국 경제는 최근 5분기 연속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눈에 띄게 개선된 상황이다. 또 백신 접종을 통해 방역 규제도 완화되면서 현재 미국의 기업들은 구인난에 시달릴 정도로 고용 시장 역시 안정을 되찾았다.
오히려 문제는 물가가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급등하고 있는 것이다. 무제한 돈 풀기와 함께 공급망 문제까지 겹치면서 최근 미국의 물가는 연일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미국의 9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 올라 2008년 8월 이후 가장 큰 상승 폭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 역시 전년 동월 대비 4.4% 상승해 3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올 들어 경제계는 물론 연준 내부에서 물가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그 때마다 파월 의장은 “현재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인 문제”라고 발언하며 긴축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최근 공급망 문제 등에 따른 물가 상승 흐름이 예상보다 길게 갈 수 있다며 입장을 바꾼 상태다.
이에 따라 현재 경제 상황은 ‘돈 풀기’가 아닌 ‘돈줄 조이기’를 모색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달부터 테이퍼링을 시작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일 연준이 테이퍼링 결정을 통해 인플레이션 문제가 일시적일 지, 지속적인 문제인 지를 판단하기 위한 시간을 벌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 연준, 조기 금리 인상에는 선 그었지만… 일각에선 “내년 6월 인상” 관측도
이미 테이퍼링 발표는 어느 정도 예상됐던 일이다. 이 때문에 이날 연준이 자산 매입 감축을 이달부터 시작하겠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0.3%, 나스닥 지수가 1% 각각 오르는 등 뉴욕 증시는 상승세를 이어갔다.
금융 시장이 가장 면밀히 촉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조기 금리 인상이 단행될 지 여부다.
일단 연준은 금리 인상에 대해선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파월 의장은 회견에서 “테이퍼링 결정이 금리 인상을 고려하고 있다는 직접적 신호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또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내년 2분기나 3분기에는 물가도 안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금융 시장 일각에서는 연준이 인플레이션에 대한 압박에 몰리다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전날 CNBC가 금융 시장 관계자와 경제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4%는 연준이 테이퍼링이 끝난 직후인 내년 7월에 연준이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씨티은행은 이날 FOMC 성명에 대해 “충분히 ‘매파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인플레이션 문제와 고용 상황 등을 반영해 첫 금리 인상 시기가 내년 6월로 앞당겨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연준 내부에서도 여전히 금리 인상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준 내 대표적인 매파로 꼽히는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달 21일 CNBC에 출연해 “연준이 내년 3분기 말이나, 아마도 4분기 초 정도에 기준금리를 인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플레를 ‘일시적’이라고 언급한 파월 의장에 대해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공급망 대란은 결코 간단히 해결될 수 없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인물이다.
보스틱 총재는 “미국은 내년에도 심각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겪을 수 밖에 없다”며 “피해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결정적인 조치에 취할 수 있도록 연준의 동료들을 설득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