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반(反)중국 노선 불참 기조가 도마 위에 올랐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자치구 인권 탄압 금지를 압박하며 무역 제재를 취하는 중에도 유독 스위스는 중국과의 자유무역 및 관계진전을 고수하고 있어서다. 유럽 국가들 사이에선 제네바에 유엔(UN) 사무국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인권 문제를 방관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11일 중국 국영 CGTN에 따르면 스위스는 지난 7일부터 나흘간 하이난성 하이커우시에서 열린 제1회 중국 국제 소비재 박람회에 유일한 특별 귀빈국 자격으로 참석했다. 중국 정부의 하이난 자유무역항 개발 계획과 면세 사업 육성을 위해 신설된 이 초대형 박람회에는 약 40개국의 1000여개 업체가 참여했다. 베르나르디노 레가조니 주중 스위스대사는 박람회에서 “우리는 중국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스위스 주재 중국대사가 직접 나서 위구르 인권 탄압 사실을 일축해 빈축을 샀다.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DW)는 왕시팅 주스위스 중국대사가 지난달 온라인으로 진행한 공식 기자회견에서 “신장 위구르인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린다는 주장은 완전한 유언비어이고 강제수용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중국과 스위스의 관계 진전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왕 대사가 강제 노동을 부인하기 직전 스위스 정부가 발간한 중국 전략 보고서에는 중국의 인권 탄압에 대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스위스 매체 스위스인포(SWI)에 따르면 스위스 정부는 올해 3월 발간한 대중국 외교정책 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을 ‘권위주의적 경향이 강화되고 반체제 인사를 더욱 억압하는 국가'로 묘사했다. 또 “중국은 사이버 능력을 이용해 전략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일방적으로 밀고 나간다”며 “중국의 인권 상황은 악화되는 반면 이 문제에 대한 중국의 대화 의지는 줄어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자유무역 협정 자체에 대해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보고서는 “양국 간 인권에 대한 분명한 시각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더 큰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그나지오 카시스 스위스 외무장관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중국의 인권 관련 대화와 무역이익이 양국 관계의 양대 현안”이라며 스위스는 문제 해결을 위해 ‘독자적인' 중국 정책을 원한다고 말했다.
DW는 이와 관련해 “스위스와 중국 간 무역거래에서 인권은 설 자리가 없다”고 직격했다. 또 스위스 정부가 내부의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득만을 고려해 중국과의 통상 분야에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스위스가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견제하려는 국제 연합전선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것이다.
데미안 뮐러 스위스 자유민주당 의원은 DW에 “중국과의 관계 진전은 중요하지만 무역 협정을 논의하면서 인권 상황 개선에 반드시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파비안 몰리나 사회민주당 의원도 “중국이 점점 더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있다”며 인권 탄압 문제에 대해 스위스 정부가 한층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젤 대학 산하 유럽 글로벌 연구소 소속 랄프 베버는 “스위스에서는 인권 유린에 맞서 싸우는 것이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이며 실제 경제적 이익이나 무역과는 무관하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면서 “스위스는 지난 20년 간 인권에 대해 항상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역 이익에 크게 의존했던 만큼 두 문제를 분리해서 보는 고정관념이 크다. 인권 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올려야한다”고 말했다.
다만 중국 인권 문제에 대한 침묵이 경제적 실익으로 직결될지는 미지수다. 글로벌 시장에서 인권과 기후변화 대응 등 인류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데 대한 중요성이 커졌고, 상당수 국가가 이러한 노선에 동참하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독일 등 일부에서는 대중국 정책과 관련한 스위스의 독자노선이 국제사회 내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편 중국 외교부는 지난 6일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내고 중국은 EU와의 포괄적투자협정(CAI) 합의를 마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과 EU는 지난해 12월 30일 CAI 체결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EU가 올해 3월 위구르 소수민족 강제 노동 및 착취에 대한 미국의 규탄에 동참하며 중국 공안 계통 관료 4명에 제재를 가했고, 중국은 EU 의회 의원 5인에 보복성 제재를 가했다. EU는 즉각 CAI 진행을 중단하겠다고 맞섰다. EU가 인권 탄압을 명분으로 중국에 제재 조치를 취한 것은 1989년 이후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