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1990년대 한국 경제 성장기를 이끈 고(故) 최종현 SK 선대회장의 경영 활동 일체가 유고 27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단일 기업의 역사를 넘어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중요 사료가 될 전망이다. SK는 디지털 아카이브의 자료를 그룹 고유의 철학인 SKMS와 수펙스추구 문화 확산 등을 위해 활용할 방침이다.

SK(034730)는 그룹 수장고 등에 장기간 보관해 온 30~40여 년 전 경영 철학과 기업활동 관련 자료를 ▲발굴 ▲디지털로 변환 ▲영구 보존·활용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지난달 말 완료했다고 밝혔다. 2023년 ‘창사 70주년 어록집’ 제작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옛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 프로젝트를 추진한 지 2년 만이다.

1980년 12월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유공(현 SK이노베이션) 인수 후 첫 출근하여,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 SK 제공

최 선대회장은 사업 실적·계획 보고, 구성원과 간담회, 각종 회의와 행사 등을 녹음해 원본으로 남겼다. 이를 통해 그룹의 경영 철학과 기법을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기업 경영의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이 같은 방침은 ‘SK 고유의 기록 문화’로 계승됐다는 설명이다.

SK는 “기업 고유의 경영관리체계인 SKMS(SK Management System)를 정립하고 전파하는 과정, 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 순간에서 임직원과의 토론하는 장면, 국내외 저명 인사와의 대담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에 담겼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복원한 자료는 오디오·비디오 형태로 약 5300건, 문서 3500여 건, 사진 4800여 건 등 총 1만7620건, 13만1647점이다. 최 선대회장의 음성 녹취만 오디오 테이프 3530개에 달한다. 이는 하루 8시간을 연속으로 들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만큼 상당한 분량이다.

1996년 1월 최종현(왼쪽) SK 선대회장이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나 환담을 나누는 모습. / SK 제공

발굴된 기록에 따르면 최 선대회장은 1982년 신입구성원과의 대화를 통해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도 인재라면 외국 사람도 쓰는 마당에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지연, 학연, 파벌을 형성하면 안 된다”라며, 한국의 관계지상주의를 깨자고 임기 내내 여러 차례 강조했다.

1992년 임원들과 간담회에서는 “R&D(연구개발)를 하는 직원도 시장 관리부터 마케팅까지 해보며, 돈이 모이는 곳, 고객이 찾는 기술을 알아야 R&D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라며, 현재 HBM(고대역폭메모리)의 성공 과정을 미리 예견한 듯 실질적인 연구를 주문했다.

같은 해 SKC 임원들과 회의에서는 “플로피디스크(필름 소재의 데이터 저장장치)를 팔면 1달러지만, 그 안에 소프트웨어를 담으면 가치가 20배가 된다”라며 우리나라 산업이 하드웨어 제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8년 1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발표를 경청하는 모습. / SK 제공

1990년대 중반 유럽 한 국가의 왕세자 면담을 위해 준비한 보고서에는 앞으로 기후 위기가 심각한 국제 문제가 된다며 법정 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환경 기준을 맞추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제안이 담겼다.

SK 관계자는 “최 선대회장의 경영 기록은 한국 역동기를 이끈 기업가들의 고민과 철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자료”라며 “양이 매우 많고 오래돼 복원이 쉽지 않았지만, 첨단기술 등을 통해 품질을 크게 향상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