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에 있어 실패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인이 성공하기까지 겪는 실패 경험은 약 2.8회. 3번은 실패해야 성공도 따라온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재창업이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다. 조선비즈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패’의 가치를 조명한다. 창업가들은 실패하며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재기에 성공했을까. [편집자 주]
국내 핀테크(금융+기술) 스타트업 최초로 100억달러(약 14조6000억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아 ‘데카콘’ 반열에 오른 토스. 이승건 대표가 2015년 국내 최초 간편송금 앱을 내놓기 전까지 여덟 번의 실패를 겪었던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돼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개원 준비 중이었던 이 대표는 고(故)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을 듣고 창업을 결심했다. 아이폰이 바꿔놓은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그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 ‘앱 하나만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호기롭게 뛰어든 첫 번째 아이템은 오프라인 만남을 기록하고 이를 친구와 공유하는 소셜미디어(SNS) ‘울라블라’. 사용자 두 사람의 휴대폰이 가까이 있어야 만났다는 걸 인증해 줬는데, 이를 위해 휴대폰 간 근거리 무선통신 기술을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누가 베낄까 봐 기술 특허를 내고, 사용자 친화적인 디자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듯했다. 한데 다운로드 수치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8명이 1년 넘게 달라 붙어 2억원을 넘게 썼지만 ‘울라블라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한 순간이었다.
두 번째 아이템 ‘다보트’도 비슷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의견을 올리고 투표할 수 있는 모바일 투표 앱에 대한 니즈는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토스가 서비스를 만드는 제1원칙인 ‘고객중심주의’에 대한 집착은 여기에서 나왔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이다.
당시 온라인 결제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이 많았다. 액티브X를 포함해 각종 보안 프로그램 설치, 휴대폰 본인인증, 공인인증서 발급 과정을 모두 거치면 오류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힌류 열풍으로 인기 절정인 ‘천송이 코트’를 중국에 팔려면 암 덩어리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인인증서 없는 새로운 송금 경험을 선사한 토스 앱에 사람들을 열광한 이유였다.
토스가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앞선 실패 경험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직 국내 창업 생태계에선 실패를 ‘쉼표’가 아닌 ‘마침표’로 치부하는 모양새다.
◇10번 망한 뒤 11번째 회사 2兆에 매각…모텔촌서 재기를 꿈꿨다
2023년 중소벤처기업부의 ‘창업 기업 생존율 현황’을 보면 국내 창업 기업의 5년 후 생존율은 33.8%로 나타났다. 이는 10개 기업 중 6개가 창업 5년 이후 폐업한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평균인 45.4%보다도 10%포인트 이상 낮은 수준이다. 실패를 딛고 재창업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창업 전문가들이 ‘실패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성공한 창업자 중에는 이 대표와 마찬가지로 실패를 거듭하다 빛을 본 경우가 많다. 화상 채팅 앱 ‘아자르’로 성공 신화를 쓴 안상일 하이퍼커넥트 전 대표(알토스벤처스 벤처파트너)가 그 예다.
안 전 대표는 성공적으로 엑시트(투자금 회수)하기 전 10번의 창업을 시도했다. 지하철 김밥 장사, 과외 중개업, 사업계획서 대리 작성 사업까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2007년에는 자본금 5억 원으로 검색엔진 개발사 ‘레비서치’를 창업, 성공에 한층 가까워졌다. 서울 한복판에 사무실을 얻고 직원도 뽑았다. ‘구글에 도전하는 학생 벤처인’이라는 수식어가 금세 따라붙었다.
위기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투자 유치가 불발된 것. 공동 창업자 7명이 모은 자본금 약 6억 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승용차와 청약저축, 월세 보증금까지 빼 회사를 정리한 안 전 대표에게 남은 거라곤 8억 원의 빚뿐이었다. 그는 “가족과 지인들을 볼 면목이 없어 연락을 끊고 잠적하기도 했다”며 “개인파산도 고려할 만큼 심적으로 괴로웠다”고 했다.
안 전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모텔촌 한가운데 있는 값싼 오피스텔에서 먹고 자며 재도전했다.
그가 분석한 레비서치의 패착은 부실한 비즈니스 모델. 막연히 유행을 좇아 아이템을 구상한 게 독이 됐다고 판단해 11번째 창업은 시작부터 달리했다. 수익 구조를 견고히 설계했고 24개월 치 자금을 비축해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결국 그는 국내 스타트업 중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인 2조 원에 회사를 매각할 수 있었다.
◇“실패 두렵다”...한국 재창업 비율 되레 ‘감소세’
스타트업이 실패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표로도 확인 가능하다. 2022년 중기부와 창업진흥원이 진행한 ‘재창업 지원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정부 지원사업에 참여한 재창업기업의 1년 생존율 97.8%로 신생기업(64.8%)의 1.5배 수준이다. 기업의 생존 기간을 길게 설정하면 차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재창업기업의 5년 생존율은 60.9%로 신생기업(33.8%)의 두 배에 가깝다.
그러나 국내 창업자들은 실패가 두려워 재도전을 마다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의 ‘국내외 재창업 지원 정책 비교 및 시사점’ 보고서(2021년)에 따르면 한국 기업인은 평균 1.3회의 실패 경험을 겪는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인이 평균 2.8회 실패하는 것과 비교하면 절반에 못 미친다. 지난해 중기부가 창업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절반에 달하는 46%가 창업 시 주된 장애 요인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꼽았다.
실제 국내 재창업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 1월 창업진흥원이 발표한 ‘창업 기업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2022년 전체 창업 기업 수는 꾸준히 증가했으나 재창업기업 비율은 36.2%에서 2021년 35.4%로, 2022년 다시 29.6%로 줄어든 상태다.
전문가들은 실패가 창업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입을 모은다.
이병헌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는 “모든 성공한 스타트업은 최소 한번 실패를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다만 실패 단계에서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품 경쟁력은 어떻게 확보해야 할지 등 실질적인 시장 접근법을 학습한 기업만이 성공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연쇄 창업자인 매트리스 브랜드 ‘삼분의 일’의 전주훈 대표는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는 아니다”면서도 “실패는 실패의 이유를 가르쳐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