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코스피 상장폐지 기준이 되는 시가총액(시총) 요건을 16년 만에 최대 10배 강화하기로 하면서 중견·중소기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2029년까지 코스피에서 시총 500억원 미만, 매출액 300억원(코스닥은 시총 300억원·매출 100억원) 미만인 기업은 단계적으로 퇴출하기로 한 것이다. 현재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대부분의 타깃 기업이 중견·중소기업에 집중돼 있어서 이들의 투자 실탄이 될 자금 조달에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9일 조선비즈가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064850)에 의뢰해 코스피 상장사 가운데 시총 500억원(2024년 말 기준), 매출 300억원(2023년 기준)에 미달하는 기업 리스트를 뽑아 보니 총 86개사가 상장폐지 기로에 놓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중견기업이 43개사로 전체 절반을 차지했고, 중소기업도 40개사로 46.5%에 달했다. 대기업(계열사 포함)은 딱 3곳에 그쳤다.
중견기업의 경우 1곳을 제외한 42개사가 시총 기준에 미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는 한솔그룹의 IT 계열사 한솔PNS(010420)부터 국내 1세대 속옷 기업으로 젊은 층을 제때 공략하지 못해 수년째 순손실을 이어온 비비안(002070)도 이름을 올렸다. 비비안의 최대주주는 지분 13.46%를 보유한 쌍방울(102280)그룹이다. 쌍방울은 최근 최대주주가 광림(014200)에서 로드숍브랜드 네이처리퍼블릭으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에넥스(011090), 동원수산(030720), 동양고속(084670), 동일제강(002690), 한세엠케이(069640), 모나미(005360), 한창제지(009460), 계양전기(012200) 등 이름을 알 법한 기업들도 줄줄이 포함됐다.
해당 기업들은 상장폐지를 막기 위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시총 미달 기업에 오른 중견기업 A사는 “2023년 적자로 시총이 하락했지만, 실적이 좋아지고 있고 향후 배당성향 확대, 밸류업(저평가된 기업가치를 제고) 계획 수립 등 적극적인 기업설명활동(IR)을 통해 주주가치 제고하려고 한다”고 했다.
현재 상장폐지 기준은 코스피 시총 50억원·매출액 50억원(코스닥은 총 40억원·매출액 30억원) 미만이다. 상장 유지 요건이 과도하게 낮아 지난 10년간 시총과 매출액 미달로 인한 상장폐지는 한 건도 없었다. 정부는 자본시장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이런 기업의 퇴출을 통해 밸류업에 힘을 싣겠다는 입장이다.
중견·중소기업계는 보완책을 요구하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자금 조달의 활로가 끊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상장하는 주요 이유는 일반 대중을 통해 수백억에서 많게는 수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저비용으로 조달할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이를 통해 기업은 부채 비율을 낮추고 자기자본을 늘려 재무 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 또 연구·개발이나 설비 투자, 신사업 진출 등을 모색할 수 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기업이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직접 금융 시장이 쪼그라들게 되면 은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엔 매우 불리한 것”이라면서 “대상 기업 중엔 시총이 현금 보유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기업가치가 건실한 곳도 많다. 좀비 기업을 가려낼 보다 세밀한 정책 대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양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기업으로선 기업가치를 올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인수·합병(M&A)을 검토하거나 IR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연합회 차원에서도 필요한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등 노력하겠지만, 우량 기업이 미래의 시장가치를 평가받지 못해 상장폐지되지 않도록 보완 대책도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는 상장을 앞두고 있는 스타트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상장을 통한 자금 회수(엑시트)가 어려워지면, 초기 스타트업까지 전반적인 생태계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스타트업도 M&A를 통한 엑시트를 적극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은 “연간 100개 안팎의 기업이 신규 상장하는 등 현재 상장사가 2750개(코스피·코스닥·코넥스 합산)에 이르고 이들의 합산 시총이 2454조원으로 엔비디아 시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거래도 안 되는 무의미한 상장을 하는 것보다 M&A를 통해 규모의 경제로 사업을 키우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