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돈을 못 받는다는 말이네요.”
판매대금 정산 지연으로 가슴을 졸이던 발란 입점 판매자(셀러)들은 28일 오전 최형록 발란 대표이사 명의의 공지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변명만 있을 뿐, 언제 정산금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 온라인 명품 거래 플랫폼 시장 점유율 1위 발란의 판매자 정산금 미지급 논란이 장기화할 조짐이다. 발란은 지난 24일부터 판매자들에게 정산금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는 25일 공지를 통해 “판매대금 산정 시스템 오류를 발견했다”며 “재산정 후 28일 새로운 정산 계획을 밝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약속한 28일, 발란은 정산금 지급 계획 발표를 또 다음으로 미뤘다. 최형록 발란 대표는 이날 공지문에서 “정산 지연 문제로 심려를 끼쳐 사죄드린다”면서 “이번 주 안에 실행안을 확정하고 다음 주에 여러분(판매자)을 만나 그간의 경위와 향후 계획을 설명드리겠다”라고 했다.
업계에선 완전자본잠식에 빠진 발란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 ‘제2의 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가 재현될 거란 우려가 나온다. 티메프 사태란 지난해 이커머스 플랫폼인 티몬과 위메프가 재정 악화로 1조3000억원의 판매대금을 지급하지 못해 4만8000개 업체가 피해를 본 사건이다.
발란의 월평균 정산금액은 300억원, 입점사 수는 1300여곳이다. 현재 각 사별로 수천~수억원이 정산금이 묶여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선 발란이 기업회생 절차를 준비 중이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관련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발란에 접촉 중이라고 밝혔다.
◇“티메프랑 똑같다” 수백억 미정산 우려에 판매자 동요
발란 입점 판매자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티메프 축소판’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앞서 모노그램, 티메프, 알렛츠 등 쇼핑 플랫폼이 판매대금 정산 지연을 시작으로 폐업 또는 기업회생에 이르렀다는 점을 고려해 상품 판매를 중단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일부 판매자들은 향후 정산금을 받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 법적 소송도 준비 중이다.
발란에서 판매 대금을 받지 못한 한 판매자는 “큐텐(티메프 모회사) 회장도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로 끝났는데, 발란도 똑같다”면서 “정산 지급 시스템 오류도, 28일 정산 일정을 공유하겠다는 말도 다 거짓이었다. 돈 없다는 말만 진실”이라고 했다.
금융감독원에 제출된 2023년 발란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발란은 자본총계가 마이너스(-) 77억원으로 완전 자본 잠식 상태다. 이에 따라 발란은 감시인으로부터 계속기업가치 불확실 지적을 받았다.
발란은 지속적으로 자금 조달을 시도했으나, 명품 수요가 줄고 티메프 사태 등으로 플랫폼에 대한 우려가 확산하면서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3000억원까지 찍었던 기업가치를 200억원대로 깎아 지난달 실리콘투로부터 150억원 규모의 조건부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실리콘투가 발란이 발행하는 전환사채(CB)를 인수해 두 번에 걸쳐 75억원씩 투자하는 조건이다.
등기부등본상 발란은 실리콘투로부터 1차 투자금 75억원을 납입받은 상태이다. 시장에선 발란이 이 자금을 활용해 입점사 정산에 활용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정산금 지급이 지연되자 실리콘투가 직접 발란의 금전 출납을 관리하고 있어 이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이거나, 75억원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발란의 재무상황이 악화했다는 등의 추측이 나온다. 업계에 따르면 실리콘투 투자 전 발란의 현금자산은 10억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발란의 자본총계가 -180억원으로, 2023년보다 2배 이상 줄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최형록 발란 대표는 28일 판매자 공지에서 “이(정산금 지연) 문제는 독립적인 의사결정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기존 투자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협의와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고 설명했다. 이에 업계에선 현재 발란이 독립적으로 경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내포한 문장이란 해석이 나온다.
◇약속한 에스크로 도입 했나, 안 했나
판매자 상당수는 지난해 9월 발란이 도입하기로 한 에스크로 시스템(구매 안전 거래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에스크로는 현금성 거래에 한해 구매자의 안전거래를 보장하는 제도로 공정거래위원회가 2006년 4월1일 의무화했다. 소비자가 구매를 하면 제3 금융기관에 대금을 보관하고, 고객들의 구매가 확정되면 판매자들에게 지급하는 형태다.
쿠팡, 11번가, 지마켓 등이 에스크로를 사용하고 있지만, 발란은 결제액을 직접 관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대규모 미정산 사태를 초래한 티메프 역시 에스크로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됐다.
발란은 지난해 티메프의 대규모 판매 대금 미정산 사태로 인한 판매자들의 불안이 고조되자, 에스크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발란의 정산 서비스를 대행하는 PG(전자결제대행)사 하이픈코퍼레이션이 25일 “발란의 정산금 지급과 관련하여 인프라만 제공할 뿐 정산 자금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발란이 여전히 정산대금을 직접 관리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한 발란 입점 판매자는 “왜 자본잠식인 플랫폼에서 상품을 팔았냐는 사람들이 많은데, 발란 거래액이 가장 크고 또 에스크로를 도입하겠다고 해 장사를 한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일각에선 발란이 회생절차를 준비 중이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는 지난 25일 발란 본사에서 미팅을 가진 한 판매자가 회사 컴퓨터 화면에서 ‘회생 관련 제출 자료’ 파일을 봤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불거졌다. 갖가지 의혹에도 발란은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은 상황이다.
발란은 다음 주 중 판매자들을 만나 정산 지연 관련 계획을 밝힐 방침이다. 현재 관련 일정 및 방법론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최형록 대표가 입장문에서 밝혔듯, 추가 외부 자급 유입을 포함한 회사 경영 구조 변화까지 염두에 두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최근 발란에 투자한 실리콘투는 이번 미정산 사태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전날 열린 주주총회에서 실리콘투는 “이번 사태를 최근에서야 파악했다”며 “(발란)경영진과 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고 있어 추후 공시를 통해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2017년 이후 발란이 유치한 누적 투자 금액은 약 900억원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