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학 영원무역(111770) 회장의 차녀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009970) 사장이 대표 취임 이후 처음으로 지주사 지분 매입에 나서고 해외에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을 설립하는 등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1947년생인 성 회장이 높은 지분율을 바탕으로 경영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2세들이 사업 성과를 입증하고 지분을 물려 받을 시기가 임박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무 전문가들은 기업 규모에 관계없이 ‘신세계(004170)식 승계모델’을 따르는 것이 정석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생전에 지분 일부를 형제들에게 공평하게 증여하고 세금은 주식담보대출 등을 활용해 알아서 마련하도록 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상속·증여세를 완화하는 친(親)기업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도 영원무역 승계에는 도움이 될 전망이다.

그래픽=이은현

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성래은 사장은 작년 5~8월 다섯차례에 걸쳐 영원무역홀딩스 주식 1600주를 매입했다. 성 사장이 지주사 지분 매입에 나선 건 2009년 이후 12년 만이다.

지분율은 0.03%에 불과하다. 영원무역홀딩스는 성 회장과 특수관계인이 지분 46.25%를 보유하고 있다. 성 회장이 직접 16.77%를, 자신이 최대주주인 수출회사 와이엠에스에이를 통해 29.09%를 가지고 있다. 홀딩스가 주요 사업회사인 영원무역(지분율 50.52%)과 영원아웃도어(지분율 59.3%)를 지배하고 있다.

창업주인 성 회장은 노스페이스, 룰루레몬 등 글로벌 스포츠 아웃도어 의류·용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사업을 하는 영원무역 회장과 노스페이스 국내 사업을 하는 영원아웃도어 대표로 경영 일선을 왕성하게 누비고 있다.

동시에 세 자녀 모두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 성 회장이 어떤 형태로든 보유한 지분을 증여할 가능성이 높다.

성래은 사장이 2016년부터 영원무역홀딩스 대표를 맡고 있고 장녀 성시은 영원무역 이사가 사회공헌활동을, 셋째 성가은 영원아웃도어 전무는 내수 브랜드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박영범 YB세무컨설팅 대표 세무사는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자녀들에게 지분을 증여한 이른바 신세계식 모델이 가장 구설수 없는 승계 방안”이라며 “생전에 공평하게 지분을 나눠야 형제 간 분쟁이 없고 대출이나 증자 등을 통해 상속 자금 마련도 도와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43년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2020년 9월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총괄사장에게 각각 보유한 이마트(139480)신세계(004170) 주식을 8.22%씩 증여했다. 이에 따라 두 회사의 최대주주 자리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2대주주로 남았다.

◇ ‘최대주주株 증여 때 20% 할증’ 규제 완화에 영원무역 수혜

영원무역을 비롯한 중견기업의 증여는 내년 이후에 활발하게 이뤄질 전망이다.

윤석열 정부가 처음 발표한 세제개편안에서 ‘최대주주 주식할증 과세’ 대상에서 중견기업을 제외했는데, 내년 이후 상속·증여가 개시되는 시점부터 적용되기 때문이다.

상속·증여세법에 명시된 ‘최대주주 주식할증 과세’란 기업 최대주주가 물려받는 주식 가치에 20%를 할증해 상속가액을 산정하는 것이다. 1993년에 정부가 최대주주 보유 주식엔 경영권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므로 세금도 더 물려야 한다며 도입했다.

할증 과세는 중소기업을 제외한 모든 기업에 적용됐으나 정부가 올해 세법을 바꿔 대기업(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 아닌 이상 할증 과세를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정부 목표대로 세법이 개정되면 성 회장이 자녀들에게 영원무역홀딩스 지분을 증여함에 따라 내야 할 세금은 크게 줄어든다.

예를 들어 증여일 전후 2개월 간 종가 평균이 4만7800원(3일 종가)으로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성 회장이 보유 주식 절반(약 114만주)을 성 사장에게 증여한다면 현행 상증세법에 따른 세금은 327억원이다.

그러나 최대주주 할증이 없어지면 세금은 272억원으로 약 55억원 줄어든다. 종가 평균에 주식 수, 증여세 최고세율(50%)을 곱한 값이다.

◇ 성래은, 스타트업 투자로 新성장동력 물색...경영 능력 ‘시험대’

다만 300억원에 육박하는 세금은 성 사장이 급여로 부담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주식담보대출 등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성 사장은 작년 영원무역홀딩스와 영원무역에서 급여와 상여를 합해 21억7300만원을 받았다.

영원무역홀딩스 주가가 지금보다 하락할 경우에도 세금이 줄어든다. 주가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3월 장중 2만원대까지 하락했다가 최근에는 5만~6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주요 사업회사인 영원무역은 작년 매출이 전년 대비 13.2% 증가한 2조8000억원, 영업이익은 70.4% 늘어난 4430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매출, 영업이익 모두 두 자릿수 증가했다.

지분 증여를 앞두고 후계 구도에서 앞서있는 성 사장은 미래 먹거리를 찾아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시험대에 섰다.

지난달 싱가포르에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설립을 주도한 것도 성과를 내기 위한 움직임이다.

CVC 1호 펀드 규모는 850억원으로 미국, 유럽, 동남아의 ▲브랜드 ▲친환경 및 특수 소재 ▲오토메이션(자동화) 관련 스타트업을 발굴해 전략적 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성 대표는 “기존 시장에 지배력을 강화하는 노력뿐만 아니라, CVC로 미래 비즈니스 기회를 물색해 빠르게 바뀌는 산업 환경 변화에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