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권 침해 논란 속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입법을 강행하는 ‘지역상권법’이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임 당시 구상한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인상 등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 대책의 연장선으로 확인됐다.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위원장인 홍익표 의원이 대표발의한 ‘지역상권 상생 및 활성화에 관한 법률안(지역상권법)’이 오는 13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 전체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산자위 전체회의를 통과하면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를 거쳐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된다.
해당 법이 제정되면 △상업지역의 비율이 50% 이상이거나 △일정 수 이상의 도소매 점포가 모여 상권을 형성한 지역을 시·도 산하 지역상권위원회 심의를 통해 ‘지역상생구역’이나 ‘자율상권구역’ 등 ‘지역상권 활성화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다. 해당 구역의 임대인과 임차인은 ‘상생협약’을 체결하고, 상공인들이 반대하면 스타벅스나 다이소 같은 대기업 직영점이나 대형 프랜차이즈가 입점하지 못하도록 업종을 제한하게 된다. 임대료 인상률을 5%로 제한하는 내용 등도 포함됐다.
당초 홍익표 의원이 지난해 발의한 이 법안이 처리되지 못한 것은 당시 법사위에서 법리적인 문제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여야가 지역상권법의 위헌 가능성 등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중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입법을 기정사실화한 상황이다.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가 이뤄지기 전인 지난 2월 취임한 권칠승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가장 먼저 공약한 사안이 ‘지역상권법 제정’일 정도다.
재계를 비롯한 정치권의 관심에도 정작 대표발의자인 홍익표 의원은 법안의 당위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상황이다. 정치권에선 홍 의원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데는 지역상권법을 구상한 주체가 아닌 탓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요청으로 입안한 청부입법(정부 부처가 만들고 싶어 하는 법률안을 국회 의원에게 청탁해 그 의원의 이름으로 법률안을 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법리 검토를 맡았던 국회 관계자는 “서울시에서 홍익표 의원실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완화하는 법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이에 대한 법제화 작업이 진행됐다”면서 “당시에는 특례조항 등으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상 임대차 계약 기간인 (최장)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는 내용 등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홍익표 의원은 “지역상권법은 일명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법으로, 임대료 상한과 함께 상생협약을 통해 지방자치단체나 정부가 (소상공인들을) 지원할 수 있는 법”이라면서 “시나 구 조례로는 (임대료 상한이나 소상공인 지원 등) 법적 강제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입법이 필요하다는 서울시와 구청 등 지방자치단체의 요청이 있었다”면서 고 박원순 시장 재임 시절 당정 협의가 이뤄진 법안이라고 설명했다.
고 박원순 시장은 당시 구도심 상권의 문제를 부동산 투기의 연장으로 보고,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할 정책을 구상했다. 지난 2018년 유럽 순방 중 박 시장은 젠트리피케이션과 관련해 “의도적으로 (상권이 활발해진) 지역에 와서 건축물을 매입해 임대료를 몇 배 올리는 일종의 투기세력이 있다”면서 “서울시가 임대료 조정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지난 2015년 12월 ‘젠트리피케이션 종합대책’을 세웠고, 2016년 1월에는 ‘상가임차인보호를 위한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에는 현재 여당이 강행하는 지역상권법의 핵심인 ‘상생협약’의 개념이 등장한다. 상생협약을 체결해 상가 임대료 인상률과 계약갱신요구권 등을 보장하는 조항이다. 다만 시 조례인만큼 법적인 강제성은 없어, 이를 의무화하기 위해서는 국회 차원의 법제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2018년 국정감사에서도 박 시장은 “임대료의 지나친 상승을 막는 법적 강제력이 필요하다”면서 “(서울시에는) 법적 권한이 없다”고 강조했다.
입법을 강행하는 민주당의 행보는 결국 표심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 경제 규모가 비슷한 국가들과 비교해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장 최신 집계인 2019년 기준으로 한국 고용시장에서 자영업자의 비중은 24.6%다. OECD 37개 회원국 중 콜롬비아(50.1%), 멕시코(32.6%), 그리스(31.9%), 터키(31.5%) 등에 이어 8번째로 높다. 반면 유럽연합(EU) 평균 자영업자 비율은 15.3%이고, 일본(10%)이나 독일(9.6%), 미국(6.1%) 등 경제 선진국에 해당하는 회원국들은 자영업자 비율이 낮다.
서울시 관계자는 “소상공인들이 오래 운영한 가게를 닫거나 임대료 부담 때문에 (운영이) 어려워진 상황을 돕기 위해 임대인과 임차인간 상생협약을 체결해 임대료 인상률이 일정 이상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면서 “조례로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등 법 개정을 국회에 꾸준히 건의해왔고, 서울시와 국회가 당정협의회 등을 통해 관련 정책에 대한 논의도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법조계와 유통업계 전문가들은 위헌 소지와 중복입법 가능성 등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 발의된 지역상권법상으로는 지역상권 활성화구역을 지정하는 기준은 대통령령을 따른다. 이 때문에 재산권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은 반드시 법률로써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도록 하는 ‘법률유보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구역별 영업 금지 업종을 지정할 경우에는 지역마다 규제 내용이 달라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할 우려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