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의 뉴 삼성'이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삼성물산(028260)출범 과정에서 주식매수청구(회사의 인수합병에 반대하는 주주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 가격이 낮게 평가됐다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31일 나왔다.

1심 재판부는 옛 삼성물산 지분 2.11%를 보유한 일성신약 등이 제기한 주식매수청구 가격 변경 소송에서 “삼성물산이 제시한 가격(주식매수청구)이 적정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 민사35부(재판장 윤종구)는 이날 “작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주가가 회사의 객관적인 가치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판결했다. 서울고법은 “삼성물산이 제시한 주식매수청구 가격을 주당 5만7234원에서 6만6602원으로 올려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삼성물산의 실적부진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 있다”, “(삼성물산 주식을 꾸준히 매도한 국민연금의) 매도가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듣기에 따라 삼성물산의 실적조작과 국민연금의 주가조작 의혹까지 연상 되는 대목이다.

삼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삼성물산 이슈가 다시 떠오르자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법원 판결에서 반전을 노릴 기회는 남아 있지만, 2심 판결이 그대로 받아 들여지면 삼성물산 합병 무효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삼성물산 리스크’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삼성가 삼남매(이재용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는 작년 9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시켜 탄생한 통합 삼성물산을 통해 그룹 지배력을 강화했다.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두 축인 전자와 금융을 아우르고 있다. 이재용(17.2%), 이부진(5.47%), 이서현(5.47%) 등 세 사람의 지분율을 합치면 28%가 넘는다.

통합 삼성물산은 이재용 부회장이 이끄는 ‘뉴 삼성’의 안정적인 발판 역할을 하고 있지만, 출범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일성신약 등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합병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삼성물산은 다른 주주들을 설득해 합병안을 통과시켰지만, ‘주주 리스크’에 노출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엘리엇과 일성신약은 작년 8월 삼성물산 주식매수청구권 가격 조정 소송을 제기했지만 올해 1월 1심에서 패소했다. 엘리엇은 올해 3월 삼성물산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모두 취하했지만, 일성신약은 독자적으로 항고에 나섰고 2심에서 유리한 판결을 얻었다.

재계에서는 일성신약이 진행중인 삼성물산 합병 무효 소송에도 이번 판결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당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비율을 1대0.35로 산정했는데, 주식매수청구 가격이 바뀌면 합병비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2심에서 1심과 다른 결정이 나서 납득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결정문을 면밀히 검토해서 재항고심에 대응할 예정이다. 합병이 문제가 되려면 합병과정에서 절차 등에 문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합병비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 거 같다”고 말했다.

김호준 대신경제연구소 지배구조연구실 실장은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았기에 확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합병비율과 합병가액 문제도 후속 판결이 나온 뒤에 따져볼 수 있을 거 같다. 사실 가격보다는 산정 기준인 제도 문제를 따져봐야한다”고 말했다.

◆ 서울고법 “삼성물산 실적 의도적일 가능성...국민연금 정당한 판단 아닐 수도" 의혹 제기

삼성물산은 작년 9월 출범 당시만 해도 지배구조 개편 수혜주로 부상했다. 패션, 상사, 건설, 리조트, 바이오(자회사) 등 이른바 의식주휴(衣食住休)를 망라하는 사업을 추진, 삼성전자에 이어 그룹을 이끌 기대주로 꼽혔다.

하지만 다양한 사업 영역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다. 통합 후 첫 분기인 작년 4분기 890억원의 적자를 냈고, 올 1분기에는 4348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삼성물산의 주가는 작년 9월 1일 17만원까지 올랐지만, 올해 5월 31일 12만원까지 떨어졌다.

삼성물산은 실적부진, 주가하락과 함께 법원으로부터 출범 과정에서 고의로 주가를 떨어뜨렸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원활한 합병 추진을 위해 삼성물산의 주가는 낮추고, 제일모직의 주가는 높였다는 것이다. 법원은 여기에 동조한 세력으로 국민연금을 지목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35부(재판장 윤종구)는 “삼성물산이 이건희 회장이 지배하는 기업 집단 내 회사이므로 상대적으로 삼성물산의 주가는 낮게, 제일모직의 주가는 높게 형성되어야 합병으로 인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삼성물산의 실적부진이 이건희 회장 등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며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합병 이사회 결의 전 두달 간 주식을 지속적으로 매도한 것이 삼성물산 주가 변동을 막은 역할을 했다”고 했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일성신약은 삼성물산의 장기투자자였는데,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합병으로 손해를 봤다”며 “결과적으로 삼성물산은 저평가됐고, 제일모직은 고평가됐다는 것이 당시 시장의 지배적인 견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인위적으로 두 회사의 합병을 추진하다보니 합병비율이나 주식매수청구 가격이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번 판결로 논의가 다시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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