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전 7시,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8번 출구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 삼성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이 ‘삼성서초사옥’이라는 행선지가 표시된 버스에서 내렸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아래 회색 정장차림을 한 남직원은 하얀색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 손에는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S 7’을 움켜쥔 채 금융정보를 조회하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정장치마를 입은 여직원은 헝클어진 갈색머리를 휘날리며 종종 걸음으로 삼성 서초타운 내로 이동했다.
삼성서초사옥행 버스가 정차한 곳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50미터쯤 걸어가자 삼성 디지털시티(수원)행 버스를 타려는 직원들이 긴 줄을 섰다.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직원들은 청바지를 입고 있거나 백팩을 등에 맸다.
‘휴우···.’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온 한 삼성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터가 서초동에서 수원으로 바뀐 이 직원은 “출퇴근 거리가 길어져서 고단하다. 적응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 삼성맨의 출근길 ‘외곽→서초타운, 서초→수원, 서초→우면동’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은 작년 말부터 대이동을 시작했다. 회사의 방침에 따라 우면동 연구개발(R&D)센터와 수원디지털시티, 서울 태평로로 이사를 갔다. 삼성 미래전략실 임직원 300여명과 일부 계열사 직원만 서초사옥에 남았다.
삼성물산 서초사옥의 건설부문 직원들도 올해 3월 경기 판교 알파돔시티로 떠났다. 상사부문 직원은 6월까지 잠실 향군타워로 옮긴다.
30분 가량 지켜봤지만, 삼성맨들의 출근길 풍경은 비슷했다.
우면동 연구개발(R&D)센터행 버스 한 대는 삼성전자 서초사옥 정문 왼편에서 간간이 직원들을 태우더니 센터로 출발했다. 삼성서초타운 앞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바로 옆 업무버스 탑승 대기실에 가봤다. 서초사옥과 수원디지털시티를 오가는 직원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업무버스가 정기 운행하는 곳이다. 버스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왕복 버스를 7차례 운행한다.
“서초사업장 이전 종료에 따라 수원사업장↔서초사업장 간 업무버스의 운행을 아래와 같이 중단하오니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탑승 대기실에는 5월 2일부터 운행 중단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 ‘희망의 땅’ 삼성서초타운…“권리금 한푼 못챙기고 떠나”
삼성의 사옥 재배치로 서울 서초동 삼성타운이 텅텅 비면서 서초2동 상인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
2008년 조성된 삼성타운은 강남역 일대의 희망이었다. 특히 삼성타운이 자리잡은 서초2동 상인들의 기대감은 컸다. 서초2동은 서울 대표 상권인 강남역 일대와 달리 소외된 상권이었다. 아파트 밀집 지역에 광화문·종로-분당·판교를 잇는 교통 요지에서도 한걸음 떨어져 있다.
하지만 삼성 타운이 조성되면서 ‘삼성 효과’를 기대한 술집, 식당들이 속속 들어섰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삼성 서초타운 근처에서 30년째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H씨는 “삼성 근처로 왔다가 되려 장사를 망친 술집이 많다. 삼성이 직원들에게 주변 술집을 가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회사 이미지를 고려한 삼성의 지침이 상인들에겐 날벼락이 됐다.
그는 “최근 권리금 1억3000만원 주고 입주한 사장 한 명이 한 푼도 못 챙기고 떠났다. 임대 기간 끝날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서초타운 조성 이전부터 장사하던 상인들은 “미칠 노릇”이라고 했다. 대로변에서 떨어진 서초사옥 인근 1층 건물의 11평 사무실 임대료는 보증금 1억원에 임대료가 월 400만~450만원에서 월 600만원으로 올랐다.
부동산 중개업자 K씨는 “삼성타운이 들어서면서 수익은 커녕 임대료만 늘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점심 시간이 되자 삼성타운은 잠시 활기를 찾았다. 전자·생명·물산동에서 건물 밖으로 나온 직원들이 짝을 지어 식당으로 향했다.
5년째 서초타운 근처에서 운영되고 있는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150석 규모 좌석에는 채 50명도 안되는 손님이 밥을 먹고 있었다. 식당 관계자는 “점심시간이면 테이블 꽉꽉 채워 2회전을 했는데, 지금은 한번 채우기도 힘들다. 요즘 정말 어렵다”고 했다.
식사 시간이 끝나고, 직원들은 모두 서둘러 사무실로 복귀했다. 서초타운은 다시 조용해졌다.
◆ 천안·탕정 사업장…“회사 분위기 엉망”
삼성SDI·디스플레이 공장이 있는 천안·아산·탕정캠퍼스 앞. 24일 새벽부터 비바람이 몰아쳤다.
육중한 몸집을 한 삼성SDI와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은 나란히 천안사업장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근길 승용차가 쉴 새 없이 빗길 위를 지나갔다. 정문을 통과한 승용차는 오른쪽에 보이는 삼성SDI 주차장 건물로 속속 진입했고, 삼성디스플레이 통근 버스는 왼편에 있는 건물 앞을 빙돌아 멈춰섰다. 직원들은 이날 사업장 입구까지 나있는 연결 통로 위 파란 지붕을 우산 삼아 일터로 걸어갔다.
아침 6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퇴근하는 야간 근무자들은 정문 밖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같은 시각 삼성디스플레이 탕정 1공장도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7시 30분쯤 829자리가 남았다고 알린 주차 공간 표시판은 한 시간도 안돼 ‘0’으로 바뀌었다.
주차공간이 없어 들어가지 못한 차들이 도로 위에 줄을 길게 늘어섰다. 한 여직원은 답답한 듯 차에서 내리더니 주차장 안을 살폈다. 안전모를 손에 든 공사장 인부들만 비를 맞으며 인도를 오고 갔다.
정문 인근에서 마주친 삼성디스플레이 직원들은 표정 하나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 화면만 쳐다봤다.
최근 삼성디스플레이 내부 분위기는 좋지 않다. 올해 1분기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안전사고가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디스플레이 업황 악화로 삼성디스플레이는 올해 1분기 2700억원의 적자를 냈다. 반면 경쟁사 LG디스플레이는 395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게 내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삼성디스플레이 직원은 “실적도 안 좋은데 안전사고까지 나서 요즘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다. 벌써부터 올해 성과급을 걱정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삼성디스플레이 내부에서 LG디스플레이의 올 1분기 성적표 언급은 금기사항이라고 한다. 한 직원은 “경쟁사 LG(디스플레이)의 실적을 윗선에 보고할 경우 조심스럽다.”고 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디스플레이가 인재 투자를 줄인다는 말이 있다. 매년 KAIST에서 산학장학생을 뽑았는데 작년부터 사라졌다고들 한다. 올해도 (장학생 선발) 전형이 없다. 회사 미래에 대한 투자나 다름없는 산학장학생 선발을 줄이는 걸 보니 업황이 안 좋긴 한 것 같다”고 했다.
탕정사업장에서는 안전사고가 잇따랐다. 지난 4월 24일 삼성엔지니어링이 시공하는 OLED 생산라인에서 작업 중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근로자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작업중지 명령이 해제된지 사흘만인 5월 3일 다시 사고가 났다. 이번에는 수백kg의 제품 적재대가 넘어져 근로자 두 명이 다쳤다.
비바람은 계속됐다. 삼성 임직원들이 거주한다는 한 주상복합단지 근처 까페엔 남편을 일터로 보낸 아내들이 하나둘 모였다. 사업장 주변은 더욱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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