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율주행차 기술을 보유한 미국 회사와 40억달러(약 4조8000억원)를 투자해 합작법인을 설립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23일 "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 전문 회사인 델파이에서 분사된 미국 업체 앱티브와 손잡고 자율주행 기술 개발 전문 기업을 미국 현지에 설립, 각각 50%씩 지분을 보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투자엔 현대차그룹 측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가 공동으로 현금 16억달러(약 1조9100억원)를 투자하고, 보유한 특허와 연구개발시설 등 4억달러(약4800억원) 규모 유·무형 자산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번 투자는 현대차그룹이 자율주행차·전기차·모빌리티 등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로는 최대 규모다.
◇세계 15위→3위…자율주행 기술 '퀀텀 점프'
그동안 자율주행 분야에서는 '변방'에 머무는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현대차그룹은 이번 투자를 통해 단숨에 자율주행 기술 수준 세계 3위로 '퀀텀 점프(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시장조사 전문기관 내비건트리서치에 따르면 앱티브는 올해 기준 세계 3위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1위는 구글의 자율주행 자회사 웨이모, 2위는 GM이다.
현대차의 자율주행차 기술 수준은 15위로, 10위 안에 있는 포드·폴크스바겐·르노-닛산 등 해외 완성차업체에 한참 뒤처져 있던 상황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이번 투자를 통해 앱티브와 기술을 공유·개발하면서 자율주행 기술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양사는 2022년까지 자율주행 부품과 소프트웨어 개발을 완료하고, 로보택시(무인택시) 상용화 계획도 세웠다.
앱티브는 전장 부품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등 첨단 차량 기술을 전문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델파이에서 2017년 12월 분사됐다. 작년 매출은 약 16조원, 영업이익 1조6000억원에 시가총액 27조원인 글로벌 기업이다. 특히 자율주행 부문에선 레벨 4~5 수준〈키워드 참조〉의 자율주행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주요 도시에서 현대차 로보택시 달린다
현대차그룹과 앱티브는 이번 합작회사 설립으로 큰 시너지를 낼 것으로 전망한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은 국내 자율주행차 규제로 인해 국내에서 자유롭게 자율주행차 테스트와 연구를 할 수 없었다. 국내 자율주행차 연구는 사전(事前) 허가를 받아야 하는 조건부 허용만 가능하고, 보험 상품 등이 부족해 글로벌 경쟁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이다.
반면 아일랜드 더블린에 본사를 둔 앱티브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완화된 싱가포르와 라스베이거스에서 이미 로보택시(완전 무인차) 시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 외에 피츠버그, 샌타모니카 등 미국 내 주요 도시에서 약 100대의 자율주행차를 운행하며 테스트하고 있다. 앱티브는 현재 시범 사업 중인 BMW 로보택시를 현대·기아차로 대체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자율주행차 판도의 게임 체인저
업계는 이번 현대차그룹과 앱티브의 합작회사가 '합종연횡(合從連橫)' 중인 자율주행차 기술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글로벌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은 주요 완성차업체와 IT업체가 협력, 합작법인 구성 등을 통해 치열한 선두 다툼을 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도요타와 혼다, 일본 통신사 소프트뱅크 등 세 회사가 세운 합작회사가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독일에선 다임러와 BMW, 아우디가 뭉쳤다. 반도체회사인 인텔도 BMW와 협력 중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이번 현대차의 합작회사 발표는 자율주행 기술 개발을 위해 끊임없이 파트너를 찾던 해외 완성차 업체에도 깜짝 놀랄 뉴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이번 협력은 자율주행차 상용화를 위한 중대한 여정의 시작"이라며 "양사가 글로벌 자율주행 기술 생태계를 선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율주행 4단계와 5단계
미국자동차공학회(SAE)는 자율주행을 기술 수준에 따라 6단계(레벨 0~5)로 분류한다. 자율주행 4단계는 운전자가 일정한 조건에서 운전에 개입하지 않고, 시스템이 모든 상황에 맞춰 차량 속도·방향을 통제하는 수준을 뜻한다. 자율주행 5단계는 운전자가 아예 필요 없는 완전한 의미의 무인 자동차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