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예산]
2년 연속 9%대 증가로 사상 처음 500조원대
적자국채 순증 26조4000억원…사상 최대치
"국가채무비율 40% 마지노선 붕괴" 평가 나와
정부가 나랏빚을 26조4000억원 늘려 내년에 513조5000억원 규모의 초(超)수퍼예산을 편성했다. 전년대비 9.5% 늘어났던 올해 예산(469조9000억원)에 이어 2년 연속 9% 이상 증가율을 이어가게 됐다.
재정분권 계획에 따른 지방소비세율 인상으로 중앙정부 사업 예산이 지방정부로 이양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총지출 증가율은 10%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총지출 증가율이 2년 연속 9%를 초과한 것은 2006년 총지출 증가율 통계가 작성된 이후 처음이다. 정부는 연구개발(R&D), SOC(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 산업·중소기업·에너지 관련 예산을 올해에 비해 크게 늘렸다고 설명했다.
수입에 비해 지출을 크게 늘리면서 올해까지 흑자기조를 유지했던 통합재정수지는 내년부터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선다. 국가채무도 내년 800조원 이상으로 급증할 전망이다. 정부가 재전건전성의 마지노선으로 상정했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40%선’이 무너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정부는 29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2020년도 정부 예산안을 심의, 확정했다. 내년 예산안은 다음달 3일 국회에 제출된다.
내년 총수입은 올해(476조1000억원) 대비 1.2%(5조9000억원) 증가한 482조원이 될 전망이다. 총지출은 올해(469조6000억원)보다 9.3% 늘어난 513조5000억원으로 편성됐다. 수입을 초과하는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정부는 올해 33조8000억원이었던 적자국채 발행한도를 60조2000억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나라 빚이 한꺼번에 26조4000억원이나 급증하는 것은 사상 최대 규모다. 이에 따라 내년 국채 발행액은 130조6000억원으로 올해(101조6000억원)에 비해 29조원이 증가할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이었던 2017년 400조5000억원이었던 정부 예산은 3년만에 500조원을 돌파하게 됐다. 올해와 내년 2년 연속 9% 이상 증가율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3차례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한 것을 감안하면 나라살림이 3년 사이 130조원 이상 늘어난 셈이다.
정부의 재정분권 계획에 따라 중앙정부 사업예산이었던 3조6000억원이 지방정부로 이양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까지의 사업 분류 기준에 따른 정부지출액은 517조1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실질적인 내년 정부 예산 증가율이 10.1%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다.
세입에서 세출을 뺀 통합재정수지는 올해까지는 흑자(6조5000억원)를 유지하지만, 내년에는 31조5000억원 적자로 돌아선다. GDP 대비 적자 폭은 1.6% 수준이다.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기금 지출 등을 미리 반영한 관리대상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72조1000억원에 달해 GDP 대비 적자폭이 3.6%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통합재정수지와 관리대상재정수지 적자규모 등은 모두 사상 최대 수준이다.
재정적자 등이 반영된 국가채무는 올해 740조8000억원에서 내년 805조5000억원으로 60조원 가량 급증한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37.1%에서 39.8%로 2.7%P(포인트) 상승한다. 기획재정부는 이 비율이 2021년 42.1%, 2022년 44.2%, 2023년 46.4%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 정부가 암묵적으로 유지해온 ‘국가채무비율을 GDP 대비 40%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는 목표가 사실상 붕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사상 초유의 ‘초수퍼 예산’을 편성하기로 한 것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2%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릴 정도로 경제환경이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갈등 장기화와 일본 정부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 등 대외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에 확장적 재정정책을 통한 성장 여력 확보가 절실해졌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우리 경제의 어려운 여건을 엄중히 인식하는 가운데, 경제 하방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해서 올해 9.5%와 비슷한 9.3%의 재정지출 증가율을 유지하기로 했다"면서 "올해와 내년의 경제적 어려움을 확장적 재정지출을 통해 보강하겠다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분야별 재정지출 내역을 보면 산업·중소기업·에너지 예산(23조9000억원)이 올해(18조8000억원)보다 27.5% 증가할 전망이다. 제조업 혁신과 소재 개발 기업 지원 사업이 크게 늘면서 예산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R&D 예산도 올해(20조5000억원)보다 17.3% 늘어난 24조1000억원으로 편성됐고, SOC 예산도 올해(19조8000억원) 대비 12.9% 증가한 22조3000억원으로 책정됐다.
전체 정부 예산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보건·복지·노동 예산은 올해(161조원)보다 12.8% 증가한 181조6000억원으로 편성됐다. 이 중 일자리 사업 예산은 올해(21조2000억원)보다 21.3% 증가한 25조8000억원으로 편성됐다. 국방예산도 올해(46조7000억원)보다 7.4% 늘어난 50조2000억원으로 편성돼, 사상 최초로 50조원대를 돌파했다.
구윤철 기재부 2차관은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사업에 예산을 늘리는 방향에 방점을 찍었다"면서 "세수 여건이 좋지않아 불가피하게 적자국채를 발행하지만, 예산 투자 사업이 성과를 내서 경기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당초 예상보다 재정상황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등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 부작용이 경제체력을 고갈시킨 상황에서,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성장여력이 회복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이후 경기가 빠르게 개선될 것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지출을 늘리면 재정 건전성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전 통계청장)는 "경제가 장기 침체로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재정지출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지출 구조조정을 병행해야 재정의 급격한 악화를 방지할 수 있다"면서 "적자국채가 한 해에만 30조원 가량 급증하는 것은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한국 경제의 대외 신인도를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