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보고서를 전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pdf 양식으로도 부탁합니다.”

8일 사단법인 블록체인법학회의 단톡방(카카오 채팅방)이 ‘띵’‘띵’‘띵’ 울렸다. 이 방에는 블록체인에 관심 많은 법률 전문가, 기자, 기업인, 교수 등 400명 넘게 모여 있다. 금융위원회가 8일 언론에 공개한 ‘리브라(Libra) 이해 및 관련 동향’ 이름의 보고서가 단톡방에서 화제를 모은 것이다.

금융 정책과 감독을 관장하는 금융위는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프로젝트 ’리브라’가 공개된 지 한 달도 안 돼 이 보고서를 내놓았다. 금융위가 특정 암호화폐를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언론들도 금융위의 보고서를 읽고 저마다의 리드(핵심 메시지)를 뽑아 신속하게 보도했다.

페이스북이 리브라 백서를 공개한 것은 지난달 18일. 백서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2020년 리브라라는 가상 통화를 발행해 송금 및 결제 서비스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은행 등의 인프라가 열악한 17억명의 금융 소외계층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새 계획의 명분도 그럴 듯하게 덧붙였다.

금융위의 보고서 첫 장에는 붉은 글씨로 ‘※ 본 자료는 언론 등의 이해를 돕기 위해 리브라 백서, 국내외 언론 및 해외 동향 등을 정리한 것으로 금융위원회의 공식적 의견 아님’이라고 쓰여 있다.  정부가 블록체인 기술은 육성하되 암호화폐는 억제한다는 ‘분리 대응' 기조를 유지하는 데다 기존 금융 시스템의 가정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암호화폐 이슈를 다룬다는 것이 금융위 입장에서는 민감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제약을 고려하면, 금융위의 보고서는 리브라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분석돼 있고 빠르게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했다.

우선 금융위 보고서는 페이스북의 동태를 꽤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리브라는 비트코인을 대체하는 글로벌 디지털 화폐를 지향하며 장기적으로 국가통제를 받지 않는 디지털 화폐 발행이 목표인 것으로 보임’ ‘루멘 가상통화의 경우 해외 송금 분야에 특화하였으나, 리브라는 온오프라인 상거래 등 경제생활 전반에 쓰이는 것을 추구’ 등 리브라의 목표를 분석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또 보고서는 “美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면서 금 태환을 중지한 것과 같이 리브라 역시 디지털 기축통화가 되면 준비금을 통한 가치보장을 중지할 가능성 있음” 등과 같이 금융 역사에서 통찰을 찾아 미래의 우려 사항을 적었다. 또 리브라가 5년 후 프라이빗(허가형) 블록체인에서 퍼블릭(비허가형) 블록체인을 전환한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진정한 블록체인 시스템이 아니라는 업계 비판에 대한 대응 조치로 보임”이라며 블록체인 업계의 반응을 통해 리브라 백서의 행간을 살폈다.

보고서는 금융위가 디지털 금융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파급력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페이스북의 사용자 규모를 보면, 사실 누구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페이스북 사용자만 24억명이고 이 회사가 인수해서 키운 서비스인 왓츠앱의 사용자는 15억명, 인스타그램의 사용자는 10억명에 달한다. 보고서에서도 언급했듯이 페이스북 사용자 24억명이 은행 예금의 1/10을 리브라로 이전하면 리브라 적립금이 2조달러를 초과하게 된다.

이 천문학적인 숫자가 달러 패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경쟁력 없는 법정 화폐을 퇴출시킬 수도 있다. 자국 국민이 자국 화폐를 덜 가지고 있다면 기존의 환율과 통화량 정책 효과는 떨어질 것이다. 이번 금융위 보고서도 리브라와 같은 국경을 넘나드는 화폐가 활성화할 경우, 국가가 법정 화폐를 이용해 정책을 펼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언급한다.

금융위의 보고서는 시대 변화 흐름이 뭔지 잘 보여준다. 암호화폐를 구현하고 통용시키는 데 ‘기술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 ‘규제 당국이 갈수록 거세지는 암호화폐 바람에 전 세계 규제 기관들이 대응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는 점’ ‘달러 패권까지 위협하겠다는 리브라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앞으로 원화 기반의 환율, 통화 정책도 한층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이다.

우리는 금융의 재정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불과 2년 만에 금융권에서는 무명의 카카오뱅크가 1000만명에 달하는 고객을 유치했다. 투자은행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CEO는 “비트코인은 사기다.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버블보다 더 심각한 사기”라고 했던 2017년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2019년 현재 ‘JPM코인'이라는 걸 만들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규제되지 않은 암호화폐는 마약 거래 등 불법 행위를 촉진할 수 있다, 만약 페이스북이나 다른 기업들이 은행이 되고자 한다면 국내외 은행 규제를 모두 준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인민은행은 국무원의 승인을 얻어 디지털 화폐를 연구하는 시장 기구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증국이 가상화폐 발행 검토 과정에서 페이스북 리브라 모델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저우샤오촨 전 중국 인민은행 총재의 발언도 전해졌다. 이런 시대에 화폐란 무엇이고 금은 무엇이며 통화·환율 정책이라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금융위가 리브라 보고서를 낸 배경에 대해서는 직접 밝히지 않았다. 세계 규제 기관과 보조를 맞춰 리브라를 주시하고 있으며 규제도 할 수 있다는 암시를 보낸 것일 수 있다. 금융위가 새 금융 패러다임을 위한 선도적 정책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작은 ‘시그널'일 수도 있다.

정부가 디지털 금융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는다면, 디지털 금융이 이 땅에서 꽃 피울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블록체인의 ‘블’자나 암호화폐의 ‘암’자만 꺼내도 경계 태세를 보였던 금융 당국에서 리브라 동향 보고서를 낸 것만으로도 기자는 반가웠다. 시대의 흐름을 봤을 때 금융당국이 보고서를 낸 것은 적절한 행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