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일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개화기를 맞추는 데 있습니다. 자생지를 안다 해도 개화기를 맞춰서 가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식물의 개화는 기상 상황에 따라 매해 달라지며, 급변하는 시기인 경우에는 하루 이틀 차이로도 희비가 엇갈립니다.

개화기를 맞추지 못하면 같은 장소를 다시 또 찾아가야 하거나 1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1년 후에라도 원하는 꽃을 본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음해가 되면 개화기가 다시 또 달라지고, 다른 식물의 개화기와 겹쳐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일이 곧잘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면 남들이 미쳤다고 인정할 만한 정도의 무리한 일정을 짜서 돌아다니면 됩니다.

설악산 중청봉 일대

지리산을 오른 다음 날 설악산을 오르는 일도 일종의 미친 짓으로 간주됩니다. 작년에 조금 일찍 가는 바람에 지리산 성삼재에서 물들메나무의 수꽃과 양성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게 한이었습니다.

그래서 1년을 기다려 올해는 며칠 늦게 가서 두 가지 유형의 물들메나무 꽃을 500㎜렌즈로 카메라에 잘 담고 내려왔습니다.

물들메나무의 수꽃
물들메나무의 양성화

하산은 길지 않았으나 문제는 다음 장소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성삼재휴게소에서 470㎞가 넘는 길을 달려 설악산 언저리인 양양군 오색약수 쪽에 도착하고 나니 밤 11시 20분이 넘었습니다. 짧은 시간 눈 붙였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설악산을 올라야 했기에 미친 짓은 성립되고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의 설악산은 뜻밖에도 진달래의 황홀경을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경남 거제도의 대금산에서 엄청난 진달래 군락의 황홀경을 보고 온 지 한 달 하고도 12일이 더 지났건만, 설악산은 이제야 제 몸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뒤늦은 상춘객의 마음까지 붉게 물들여버렸습니다.

대청봉 오르는 길의 진달래(2019.05.16)

그러나 그 외의 다른 꽃들은 좀 일렀습니다. 홍월귤 정도만이 앙증맞은 항아리 모양의 꽃을 만들어 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어두컴컴한 숲길을 걸어 달빛 하산을 완료하고 나니 13시간 27분의 산행기록이 세워졌습니다.

기록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찜찜했습니다. 조금 일러 노랑만병초의 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8일 만에 다시 설악산 앞에 섰습니다. 미친 짓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1년을 또 기다려야 합니다.

홍월귤

8일 만에 다시 찾은 숲은 그새 색이 좀 바뀌어 있었습니다. 바닥으로도 그새 여러 꽃이 피어나 산행의 심심함을 덜어주었습니다. 두루미꽃은 흰 목을 길게 빼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태세로 자라났습니다.

두루미꽃
큰앵초

큰앵초를 포함한 앵초과 식물은 개나리나 미선나무처럼 장주화와 단주화로 된 2가지 형태의 꽃을 피웁니다. 굳이 꽃의 종단면을 보지 않더라도 2가지 형태의 꽃이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합니다.

화관 속에 암술이 먼저 보이면 장주화, 수술이 먼저 보이면 단주화입니다. 물론 둘 다 열매를 맺는 양성화입니다.

왜 그런 형태의 꽃을 만드는 건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양성화에서 암수딴그루(또는 암수딴포기)로 되어가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과도기적 형태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큰앵초의 장주화
큰앵초의 장주화
큰앵초의 단주화
큰앵초의 단주화

중청대피소 주변에는 산민들레가 많이 번져 자라는 모습이었습니다. 서양민들레처럼 보이지만 총포조각을 잘 들여다보면 끝에 삼각상의 돌기가 없고 뒤로 젖혀지지도 않는 게 분명 산민들레입니다.

고지대에서 산민들레가 자라는 모습이 약간 신기하긴 하나 강원도의 몇몇 높은 산에서 그런 모습이 곧잘 보입니다.

중청봉 주변의 산민들레

노랑만병초는 꽃이 피어 있긴 했으나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백두산 주변에는 흔히 퍼져 자라지만 남한에서는 설악산에서만 유일하게 자생하는 종입니다.

허가를 받고 출입한 자생지의 환경은 추위와 더위를 모두 막아줄 법한 덤불에 가려진 곳이어서 밖에서는 노랑만병초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설악산의 노랑만병초

반면에 홍월귤이나 들쭉나무는 햇빛에 종일 노출되는 바위지대에서만 자랍니다. 최근에는 고온 탓인지 홍월귤의 열매가 빨갛게 익은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열매를 맺을 법한 모양새를 한 것이 있었습니다. 점점 낮아지는 결실률을 올해는 좀 끌어올릴 모양입니다.

들쭉나무

들쭉나무의 꽃도 몇 개 보았는데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들쭉나무의 열매는 댕댕이나무의 열매와 달리 동글납작한 편입니다. 댕댕이나무나 개들쭉 같은 것의 열매는 긴 타원형인데, 백두산 쪽에서는 그런 것을 들쭉나무의 열매로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쭉나무의 열매를 긴 타원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전에 TV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열매가 달리는 나무를 보고 들쭉나무로 소개했으나 그건 잘못입니다.

열매나 접해봤지 꽃을 볼 줄 몰랐던 소위 ‘헌터’라는 약초꾼들이 댕댕이나무나 개들쭉을 들쭉나무로 부르면서 그렇게 오인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고지대에서 살아가는 이런 종류의 나무들을 유존목(relic trees)이라고 부릅니다. 등산해서 올라온 게 아니라 빙하기 때 남하했다가 올라가지 못하고 높은 지대를 피난처 삼아 남아 있게 된 나무들입니다.

지구온난화의 가속화로 기후변화가 심화되면 그네들은 더위를 피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사라질 위기에 놓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식물의 개화기의 추이를 잘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배암나무(2019.05.24)

일례로, 서북능선의 중간 지점부터 나타나는 배암나무가 5월 24일에 피어 있어서 좀 놀랐습니다. 물론 그보다 높은 지대의 배암나무는 아직 꽃봉오리 상태입니다.

하지만 2010년에는 6월 5일에 피었던 서북능선의 그 배암나무가 9년이 지난 지금은 10일이나 빠른 시기에 피는 것입니다. 대충 계산해서 1년에 하루씩 빨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산대로라면 20년 후에는 배암나무가 5월 초순에 핀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혹시 그 전에 더 이상은 설악산에서 못 살겠다 하고는 금강산 이북으로 옮겨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 단순하게 몇 종의 나무만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미처 셈하지 못하는 손해가 더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