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지급지시 대행서비스 제공업자' 도입 검토
고객이 은행계좌 접속해 이체하는 불편함 사라질듯
금융위원회가 금융산업의 게임체인저(Game Changer·룰을 바꾸는 시장 창조자) 역할을 할 수 있는 'PISP(지급지시 대행서비스 제공업자)'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PISP가 도입되면 계좌이체 방식의 지급결제도 신용카드결제처럼 간편해지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편의성이 커지고 선택지가 넓어지게 된다. 은행이 독점하고 있던 고객의 계좌정보 접근권과 계좌이체 권한을 핀테크업체도 가질 수 있게 되는만큼 핀테크산업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15일 금융위와 핀테크업계에 따르면, 금융위 금융혁신기획단은 PISP 도입을 위한 방안을 검토하며 해외 사례 등을 연구하고 있다. 금융위 고위관계자는 "PISP 도입 필요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맞다"며 "아직은 법제도를 정비할 정도의 단계는 아니고 금융혁신기획단 차원에서 스터디를 하는 단계로 보면 된다"고 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위가 내부적으로 PISP 도입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PISP는 금융소비자가 동의할 경우 소비자의 은행 계좌에서 타인의 은행 계좌로 직접 자금을 이체해주는 서비스를 뜻한다. PISP가 도입되면 핀테크업체가 금융소비자의 계좌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동이체까지 도맡아서 할 수 있게 된다. 핀테크업체가 개별 은행과 일일이 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핀테크산업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예컨대 계좌이체 방식으로 인터넷에서 물건을 살 경우, 지금은 고객이 직접 자신의 은행 계좌에 들어가서 판매자의 계좌로 돈을 보내야 한다. 계좌에 들어가서 상대방 계좌번호를 입력하는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카카오페이 같은 간편 결제 서비스를 이용하더라도 미리 충전해놓은 금액 안에서만 결제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전자금융업자의 충전 한도는 200만원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계좌이체 방식의 지급결제는 전체 지급결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6.7%(2017년 금액 기준)에 불과했다. 계좌이체 방식의 지급결제가 신용카드보다 불편하기 때문에 모바일 페이 이용 활성화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PISP가 도입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고객이 PISP에 자신의 계좌에 대한 지급지시 권한을 허용해주면 PISP가 고객을 대신해서 계좌이체 거래를 해준다. 고객이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고 결제 버튼만 누르면 은행 계좌에 접속하거나 부족한 돈을 충전할 필요없이 PISP가 바로 계좌이체 거래를 해주는 것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편리하게 직불 방식의 지급결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판매자 입장에서도 신용카드 거래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득이다. 핀테크업체 입장에서도 PISP가 도입되면 200만원의 충전 한도 규제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만큼 적극적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이지영 금융결제원 금융결제연구소 연구역은 "PISP는 직불방식의 혁신적인 지급서비스가 출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은행이 제공하는 오픈 API를 통해 핀테크업체가 손쉽게 지급결제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핀테크업계에서는 PISP 도입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간편 송금서비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 관계자는 "PISP가 도입되면 개별 금융기관과의 계약을 통해 별도의 개발을 하지 않아도 되고 결제망 사용에 대한 비용도 합리화돼 핀테크 산업 전반적인 진입장벽을 낮춰줄 것"이라며 "글로벌 스탠다드에 걸맞는 결제망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핀테크업체 관계자도 "전자금융업자의 충전 한도나 송금 한도 등 핀테크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여러 문제가 PISP 도입으로 단숨에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해외 주요국도 앞다퉈 PISP를 도입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1월 PSD2(제2차 지급결제산업 지침)를 시행하면서 PISP를 전면 도입했고, 일본도 뒤를 이었다. EU가 시행한 PSD2는 고객이 동의한 경우 은행이 PISP와 AISP(계정정보 서비스 제공업자) 등 제3자 제공자(TPPs)에 오픈 API 형태로 금융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AISP는 고객 계좌 정보에 대한 접근을 허용해 고객이 가진 여러 은행 계좌 정보를 한 눈에 알기 쉽게 제공하는 서비스다. AISP는 이미 금융위가 마이데이터 산업 도입을 발표하면서 국내에도 도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PISP와 AISP는 비행기의 좌우 날개와 같아서 하나만 있어서는 큰 효과를 내기가 어렵다"며 "EU처럼 두 서비스를 모두 허용해야 시너지를 내면서 핀테크라는 비행기가 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PISP를 국내에 도입하려면 금융소비자와 PISP 업자, 은행간 거래에 적용할 수 있는 인증절차와 보안절차가 필요하다. 마이데이터 산업 육성을 위한 데이터 경제 3법(개인정보보호법ㆍ신용정보법ㆍ정보통신망법)의 국회 통과가 지연되는 것도 풀어야 할 과제다.
서정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PISP가 도입되면 은행이 독차지하고 있던 고객과의 접점이 핀테크업체로 분산되기 때문에 서비스 이용 요금은 낮아지고 질은 개선되는 등 소비자의 효용이 높아질 수 있다"며 "금융 혁신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