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구단을 맡은 빌리 빈 단장은 1997년 취임 후 데이터를 활용해 저평가된 선수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야구선수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한 폴 디포데스타와 함께 비교적 적은 연봉으로 데려올 수 있는 선수를 찾았다. 그 결과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가장 가난했던 애슬레틱스는 2000년 이후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성공 신화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메이저리그의 모든 팀이 데이터 분석을 핵심 역량으로 여기고 있다. 컴퓨터 과학, 물리학, 수학 등 고급 분석 관련 학위 소지자를 12~15명씩 보유한 구단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야구계의 데이터 혁명처럼 각종 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AI) 기술은 앞으로 각 산업에 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맥킨지 글로벌연구소(MGI)가 19개 산업과 9개 업무 기능에 걸쳐 400개 분석 기술 사례를 분석해 본 결과 딥러닝(심층 학습) AI 기술을 활용하면 기존 분석 기술 대비 산업별로 30~128%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액수로 따지면 연간 3조5000억~5조8000억달러의 가치(매출 기준)를 창출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여행·물류·소매업이 AI 최대 수혜
AI 기술 도입 시 가장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은 여행, IT, 물류, 소매업 순으로 나타났다.
여행업과 물류업의 경우 AI 도입으로 창출될 경제적 가치는 각각 최대 5000억달러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 업계 전체 매출의 11.6%, 6.4%에 각각 해당하는 규모다. 이미 효과는 나타나고 있다. 한 여행사는 고객을 세분화해 호텔이나 항공사 등 추천 시스템 알고리즘을 만들어 추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더니 매출이 10~15% 증가했다.
물류업계에선 AI 기술이 운송 경로를 최적화해 배달 시간을 줄이고 연료효율을 높이는 데 활용되고 있다. GE가 데이터 선두 기업인 캐글(Kaggle)과 협력해 데이터 과학자들에게 날씨와 바람, 비행기 저항도와 같은 변수를 고려해 연료효율에 최적화된 비행 계획 알고리즘을 짜도록 한 결과 연료효율성을 12% 높인 것으로 나왔다. 한 유럽 트럭 회사는 운행 차량과 운전자의 운전 습관을 모니터하는 센서를 도입한 뒤 언제 속도를 내고 줄일지 등을 실시간 조언해 연료비를 15% 줄였다.
아마존·까르푸 등 대형 유통업을 중심으로 한 소매업에서 AI가 창출할 경제적 가치는 최대 8000억달러로 추정된다. 독일의 온라인 유통업체 오토(Otto)는 AI 기술로 향후 30일간 어떤 상품을 판매할지 예측해 재고를 미리 준비함으로써 배송 기간뿐 아니라 반품량도 줄였다. AI 영향이 가장 적을 것으로 예측되는 항공우주·방위산업만 하더라도 AI가 창출하는 잠재적 경제 가치가 500억달러에 이른다. 레바논 1년 GDP에 버금가는 규모다.
◇마케팅·영업 부문에 가장 큰 효과
기능별로 본다면 마케팅과 영업 분야에서 AI 활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고객 감소로 몸살을 앓던 한 유럽계 은행은 어느 고객들이 거래를 줄일지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개발, 거래가 뜸한 고객을 타깃으로 맞춤형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은행을 바꾸려는 고객 수가 15% 줄었다. 중국 앤트보험은 지난달 새로운 AI 시스템을 도입해 보험금 청구에 걸리는 시간을 평균 49시간에서 1초로 줄이겠다며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반도체 등 첨단 제조업 분야에선 생산비를 5~10%가량 줄이는 역할을 한다. 한 반도체 제조업체는 머신러닝으로 사무실이나 창고에서 나가는 최적의 출고 시간을 분석해 물품 배달 시간을 30% 단축하고 생산 수율을 3~5% 늘렸다.
AI 기술은 돈세탁 등 범죄 유무를 가려내기도 한다. 유럽의 한 결제 기관은 여러 은행과 돈을 추적할 수 있는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도입해 수사관이 탐지하기 어려운 불법 운반책 계정의 경로를 찾아내고 있다. 독일 에너지 기업 이온(E.ON)은 헝가리 한 도시에서 실제 전기 사용량이 납부한 전기료보다 세 배 많다는 것을 알아챈 후 머신러닝 기술을 활용해 돈을 내지 않고 전기를 훔쳐 쓰는 기업과 가구를 파악해서 전기 도난을 30% 줄일 수 있었다.
◇차세대 전기 같은 존재 'AI'
AI는 현재 S-커브(신기술이나 제품 성장 주기)의 초기 단계에 돌입했다. 즉, 구글·아마존·텐센트 등 소수의 파워 유저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맥킨지가 전 세계 글로벌 기업의 5000명 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글로벌 기업의 10%만이 전사적으로 AI 기술 도입을 시도 중이다. 글로벌 기업의 3분의 2는 아직 AI를 도입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기업의 임원 45%는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우려하면서도 막상 AI 도입은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그럴까? AI 도입의 선결 조건인 디지털화의 초석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는 클라우드·모바일 등과 같은 기반 기술과 빅데이터 및 관련 분석 기술 역량에 달렸다. 이 역량이 높지 않다면 AI라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봤자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일부에서는 AI 기술 자체의 성숙도가 아직 낮고 불확실한 투자로 실패할 우려가 있다고 여긴다. 또는 지금은 기다렸다가 기술적 성숙도가 올라간 후 대량 투자를 통해 한 번에 따라잡는 게 더 현명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정답이 아니다. 기다림은 리스크가 가장 큰 전략이다. AI 기술과 데이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AI 파워 유저들은 벌써 1~5% 수준의 이익 개선 효과를 내고 있다. 이 기업들은 AI 도입을 통해 추가로 획득한 이익을 다시 AI에 재투자함으로써 더 높은 경쟁 우위를 취할 것이다.
AI는 차세대 전기와 같다. 전기의 발견으로 과거 산업이 크게 변화했듯 AI도 교통, 제조, 의료, 통신 등 전 산업을 바꿀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한국 경제성장과 일자리도 AI 글로벌 경쟁력이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빅데이터 조성을 위한 개인 정보 관련 제도의 정비, 데이터 유통 및 거래를 활성화할 수 있는 기반 구축 등 국가 차원의 전략이 중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