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업계가 발암 의심 물질을 함유한 중국산(産) 원료 의약품 '발사르탄'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9일 중국 화하이가 제조한 발사르탄 원료 의약품에 발암물질이 함유된 것으로 확인되자 해당 원료를 사용한 국내 고혈압약 115제품에 대해 판매 중지 처분을 내렸다.
발사르탄은 혈관을 수축시키는 호르몬 분비를 억제해 혈압을 낮춰주는 물질이다. 최근 중국에서 생산된 발사르탄에서 NDMA라는 2급 발암 가능 물질이 검출되면서 이 원료를 사용해 고혈압약을 제조·판매해온 국내 기업들이 매출과 신뢰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판매 중지된 의약품을 복용해온 환자는 17만8536명에 달한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건이 지난 2009년 식약처가 발암물질 석면이 함유된 원료를 사용한 의약품 120여 종을 한꺼번에 회수한 '탈크 파동'처럼 제약업계를 뒤흔들 스캔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발사르탄 외에도 다른 중국산 원료 의약품이 들어간 국내 의약품이 다수 판매되고 있어 중국산 공포는 계속 확산될 전망이다.
◇고혈압약 제조사들 '날벼락'
이번 사태는 지난 5일 유럽의약품청(EMA)이 중국산 발사르탄에서 발암 의심 물질이 확인됐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EMA 조치를 접한 식약처도 지난 7일 중국산 발사르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219품목의 판매·제조를 잠정 중지했다. 식약처는 현장 조사를 통해 발사르탄 사용 허가를 받았지만 실제로 사용하지 않은 104제품에 대해서 중지 조치를 해제하고, 나머지 제품에 대해서는 판매 중지를 유지했다. 대부분 노바티스가 개발한 고혈압 오리지널 의약품 '디오반'의 복제약이다. 디오반은 중국산 발사르탄을 쓰지 않아 판매 중지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디오반 복제약을 제조·판매해온 상당수 중소 제조사는 하루아침에 판매가 막히면서 비상 상황을 맞았다. 시장조사 기관 유비스트에 따르면 현재 판매 중지된 115가지 고혈압약 제품의 지난해 매출 총액은 390억원(원외 처방액 기준)가량이다. 대부분 연매출 1000억원 이하의 중소 업체이기 때문에 이번 판매 중지로 타격이 크다.
고혈압약을 주력으로 삼았던 제약사는 서둘러 판매 제품을 늘리기 위해 외국 제약사와 접촉하고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문제 의약품을 복용해온 환자들은 정부와 회사 측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판매 중지 조치를 당한 제약사에는 해당 약을 복용해온 고객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한 중소 제약사 관계자는 "10년간 같은 약을 복용했다는 한 환자가 수화기 너머로 고성을 지르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바람에 대응하느라 30분 넘게 진땀을 뺐다"고 말했다.
중지 조치 대상 기업 중 일부 기업은 서둘러 제품 회수에 나섰다. 병·의원과 협의해 대체약 마련도 논의 중이다. 하지만 대다수 기업은 "식약처의 추가 조치를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 아직 식약처가 NDMA 정밀 분석을 끝내지 않은 상태라 중국산 발사르탄의 위해성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중소 제약사 관계자는 "당장 회수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커서 초조하게 식약처의 최종 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 상위 제약사 임원은 "식약처에서 판매 중지당했다가 해제된 기업들도 발암물질을 수입했다는 '낙인'이 찍혀 소비자 외면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 당분간 중국산을 수입한 기업들은 매출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산(産) 공포 확산되나
업계에서는 중국산 원료 의약품을 사용한 다른 국내 의약품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은 최근 들어 중국에서 가장 많은 원료 의약품을 수입하고 있다.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수입 원료 의약품 규모는 총 2조161억원(87국)인데 이 중 중국산이 6154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국내 중소 제약사들이 원가 절감을 위해 고혈압약뿐 아니라 백혈병 치료제 등 각종 항암제에도 중국산 원료 의약품을 대거 도입했지만 중국산 원료 의약품에 대한 불신으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