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에서 AI(인공지능)는 각종 장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해 비용을 절감하는 방식으로 활용될 것입니다. AI를 얼마나 활용하느냐가 기업 생존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27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에 있는 투자 회사 선보엔젤파트너스의 한 사무실. 오토닉스, 조광페인트, 유벡, 현대공업 등 경남권 중견기업 15곳의 대표이사와 관계자 등 30~40명이 최재식 울산과학기술원 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전략 등 5~6시간 동안 진행된 특강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날 모인 사람은 대부분 '동남권 중견기업 연합 투자 펀드'의 출자사 소속이다. 작년 9월 경남권 중견기업 15곳이 10억~50억원씩 투자하고 산업은행이 80억원을 출자해 400억원 규모로 만든 펀드다. 특히 제조업 위기 속에서 가업을 물려받았거나 승계를 준비하는 창업주 2~3세들이 의기투합해 적극적으로 이 펀드와 관련된 활동에 나서고 있다. 기업 오너들이 아니면 먼 미래를 내다보는 과감한 투자 결정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펀드를 통해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중견기업들과 협업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춘 스타트업을 발굴해 미래 성장 동력을 찾는 게 진정한 목적이다.
◇"지방일수록 4차 혁명에 소외"
현장에서 만난 중견기업 대표들은 "제조업 침체 속에서 지방은 수도권보다 4차 산업혁명 같은 변화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했다. 산업용 센서와 제어 기기 등을 만드는 오토닉스의 박용진 대표는 "중견기업들은 대기업과 달리 별도로 팀을 꾸려서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없고 자기 회사와 협업할 수 있는 어떤 스타트업이 있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국내 정보통신 분야 벤처기업의 82%가 수도권과 정부 연구 기관이 많은 대전 지역에 몰려 있다.
이 펀드 설립을 주도한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산 지역 조선 기자재 업체 선보공업 창업주의 아들인 그는 선보공업에서 일하던 몇 년 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생각하고 LED 사업 등에 투자했다가 100억원가량을 손해 봤다. 그는 "중견기업들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충분한 정보 없이 경영진이 직관적으로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는 일이 적지 않다"며 "미래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중견기업이 모여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역 네트워크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펀드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작년 9월 출범 이후 중견기업 연합 펀드는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투자 플랫폼 기업 '루트에너지', 스마트 필름 생산 업체 '리비콘' 등 일곱 기업에 70억원을 투자했다. 올해는 투자 규모를 100억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투자뿐 아니라 출자사들이 매달 모여 로봇·인공지능·사물인터넷 등 제조업에 관련된 최신 기술 동향과 그 분야에서 유망한 스타트업을 소개받고 관련 강의도 듣는다. 출자사 중 몇몇 기업은 이 과정에서 만난 스타트업의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사업을 하는 방안에 대해 지분 투자 등까지 검토하면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지역 제조업의 좋은 선례 될까
정부와 금융권에서도 이런 중견기업들의 시도를 주목한다. 중견기업 처지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신기술을 탐색할 기회가 되고, 스타트업으로서는 자금 투자와 함께 수십 년의 경영 노하우와 마케팅 능력, 수출 네트워크를 가진 파트너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잘만 하면 중견기업은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고, 스타트업은 안정적으로 펀딩받아 좋고, 지역 경제도 활력을 되찾을 수 있으니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셈"이라며 "지역 기업들이 미래에 대해 더 불안해하고 취약한 만큼, 정부 차원에서도 지역 경제에 필요한 정책을 더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또 동남권 중견 기업들이 뭉쳤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참여하고 싶다는 중견기업도 속속 생기고 있다. 산업은행 등은 전라도 등 서남권을 비롯해 다른 지역의 중견기업이 참여하는 펀드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자동차 부품 업체인 현대공업 강현석 대표는 "몇 년간 국내외 각종 기술 관련 박람회·전시회를 다녔는데 변화가 빠르다는 것만 느낄 뿐 막연할 때가 많았다"면서 "이 펀드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업의 앞날을 고민할 수 있게 돼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