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강풍이 불던 3일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경기난원. 농촌진흥청 관계자로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접란 재배 농가라는 소개를 받았지만 호접란을 키우던 유리온실은 텅비어 있었다. 맨 마지막 유리온실에만 출하를 앞둔 호접란이 조금 남아 있었다. 예년 이맘 때 같으면 화사한 꽃을 매단 호접란이 가득했을 유리온실이 을시년스러운 모습인 이유가 궁금했다.
경기난원은 일명 ‘김영란법’ 발효와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더 이상 호접란으로는 수익성을 맞추기 힘들다고 판단, 호접란 재배를 중단하고 황금향과 파인애플수박으로 작물을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정민 경기난원 대표는 “0.5헥타아르(약 1500평) 규모에서 4억원 이상의 매출과 1억5000만원 이상의 순이익을 올리던 때도 있었지만 최근 몇 년 호접란 가격이 계속 떨어지면서 지금은 매출 2억원도 올리기 힘들어 재배작물을 변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형제 중 둘째인 이 대표(사진)가 2010년 한국농수산대학을 마치고 호접란 재배에 뛰어들 당시만 해도 호접란은 수익성이 괜찮은 작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와 유리온실에서 '실컷' 농사일을 거들었던 형과 동생은 호접난 재배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지만 '형제 중 누군가는 부모님이 일궈 놓은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농대를 지원했다"고 했다.
그가 부모님을 도와 호접란 재배에 뛰어든 이후 약 5년 동안 몸은 힘들었지만 돈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2015년부터 화훼재배가 꺾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 됐다. 그는 “한국 호접란 농가들은 고사직전”이라고 평가했다.
이 대표의 유리온실은 평택 고덕 신도시, 삼성전자·LG디스플레이 평택공장과의 거리가 차로 10분에 불과해 최근 몇년 사이 땅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농사일로 고생을 경험한 만큼 농업을 포기하고 가진 땅으로 편하게 살 수도 있겠지만 농업을 천직으로 생각한 그는 호접란 대신 귤의 일종인 황금향과 파인애플수박으로 재배 작물을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경기난원은 2015년 기존 농장과 좀 떨어진 곳에 7억원을 들여 유리온실을 짓고 황금향 모욕을 심었다. 지난해 처음으로 4톤(t)의 황금향을 수확했다. 올해는 호접란을 키우던 유리온실에 파인애플수박을 키워 평택지역에 판매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그 동안 호접란만 키워 아직 과일 농사에는 익숙치 않지만 평택시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판매가 무난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평택시 인구는 지난해 기준으로 약 47만명이다. 고덕 신도시를 비롯해 삼성전자 등 대기업 입주가 완료되면 지금보다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호접란 농가라고 해서 방문했는데 텅빈 온실을 보고 당황했다.
“2015년 이후 우리나라 화훼농가가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묘목값과 비료값, 냉난방비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침체와 김영란법으로 화훼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호접란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인건비 건지기도 힘든 상황이다. 먹거리는 화훼보다 상황이 훨씬 나은 것 같다. 한 가지 작물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호접란을 키우던 유리온실에 황금향과 파인애플수박을 키울 계획이다. 기업도 기존 사업의 성장성이 떨어지면 포기하고 새로운 사업으로 갈아타지 않나.”
-화훼농가가 얼마나 어렵나.
“2010년 국내 호접란 시장은 1000만주 규모였는데 2015년 이후 400만~500만주로 반토막이 났다. 시장이 줄어드니 호접란 재배 농가도 같은 기간 120농가에서 40농가로 감소했다. 평택은 화성·평택·고양·용인·서산 등과 함께 호접란 주산지였는데 호접란을 재배하던 농가 수가 2015년 11개 농가에서 현재는 4개 농가로 줄었다.”
-호접란 재배를 포기한 것은 이해하겠는데 황금향과 파인애플수박을 선택한 이유는.
“기존에 사용하던 유리온실을 활용해 곤충을 사육하는 방법도 고민해 봤다. 하지만 곤충은 아직 좀 더 지나야 제대로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판단했다. 대신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는 수요가 꾸준하다. 평택시가 관내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관내에서 소비하는 ‘로컬푸드 시스템’을 8월부터 시행키로 한 것도 재배 작물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겨울철 기온이 크게 떨어지는 경기도에서도 황금향을 키우려면 난방비가 많이 들 것 같다.
“중부지방에서 황금향을 키우려면 겨울에는 난방을 해줘야 한다. 한반도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남부지방에서는 노지에서 황금향을 키우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정 부분 자연광을 활용하는 난방이 가능한 유리온실 안에서 황금향을 키우기 때문에 난방비를 절약할 수 있다. 아열대 식물인 호접란의 경우 11월부터 난방을 해줘야 하는데 황금향은 1월에만 난방을 해주니 난방비를 50% 이상 절약할 수 있다.”
-황금향을 유리온실에서 키운다고 해도 노지에서 키우는 제주도보다 생산비가 더 들어 경쟁력이 떨어질텐데.
“노지에서 황금향을 키우는 제주도처럼 겨울 시즌에 상품을 출하해서는 가격 경쟁이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제주도에서 황금향이 출하되지 않은 추석명절 무렵에 출하한다. 명절에는 과일 수요가 많은데 제주도산 황금향이 출하되지 않는 때에 추석에 출하하다 보니 가격이 괜찮다.”
-그래도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것 같다.
“최근 젊은 농부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제 농업은 할 일 없으면 물려받는 가업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일반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내가 키우려는 작물이 경쟁력이 있는지, 팔 곳은 있는지 많은 고민을 한 뒤에 농업을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 가업을 물려받는 사람도 예전부터 하던 일이니 그냥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수익성이 없으면 과감하게 다른 작물로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