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3세인 조현아(44)·조현민(35) 자매가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다. 차녀 조현민 전무가 광고 대행사 직원을 상대로 '갑질'을 했다는 논란이 불거진 지 만 10일 만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2일 "국민 여러분과 대한항공 임직원께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두 딸에 대해)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즉시 사퇴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장녀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은 항공기 회항 사건으로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석 달 만인 지난 3월 말 경영에 복귀해 논란이 됐다.
이번에 문제가 된 차녀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는 진에어 부사장,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 등 그룹 내에서 총 7개의 임원 직책을 맡고 있다.
갑질 논란이 불거진 지난 12일 이후 조 회장이 직접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 회장은 사과문에서 "대한항공의 회장으로서, 또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제 여식이 일으킨 미숙한 행동에 대해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고, 저의 잘못"이라고 했다. 조 회장은 또 "전문 경영인 도입 요구에 부응해 대한항공에 전문 경영인 부회장직을 신설해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를 보임하겠다"고 했다. 재계에선 물컵에서 시작된 논란이 총수 일가에 대한 전방위 압박으로 퍼지자 나온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앞서 관세청은 지난 21일 오전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등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자택과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있는 대한항공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압수 수색은 최근 '조 회장 일가가 해외에서 물건을 산 뒤 관세나 운송료를 내지 않고 국내로 들여왔다' '총수 일가가 수하물 밀반입 전담팀을 두고 범법 행위를 저지른다'는 사내 제보와 인터넷 게시글에 대한 언론 보도가 쏟아진 이후 이뤄진 것이다. 관세청은 조양호 회장의 아내 이명희씨와 3남매 등 4명에 대해 '밀수 및 관세 포탈' 혐의를 적용해 지난 17일부터 최근 5년간 이들의 해외 신용카드 사용 명세 등을 분석해왔다.
관세청은 이날 압수 수색에서 한진그룹 총수 일가가 해외에서 구입하고 세금을 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명품 관련 자료를 다수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사관들은 밀수된 것으로 의심되는 각종 명품과 가구 등을 직접 압수하지는 않았지만, 사진과 동영상으로 촬영해 명품 등이 국내에 반입됐다는 '증거 자료'를 남겼다. 이 외에 해외에서 구매한 물품 관련 자료가 남아 있을 수 있는 총수 일가의 개인 컴퓨터, 외장 하드, 관련 서류도 압수물에 포함시켰다.
관세청은 확보한 증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한진 총수 일가가 밀반입한 '명품 리스트'를 작성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청 관계자는 "총수 일가가 해외에서 신용카드로 구매한 물품이 집안에 있는지, 그 물품에 대한 관세를 제대로 냈는지 일일이 대조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탈세 혐의가 나올 경우 향후 총수 일가를 직접 소환해 조사할 수도 있다"고 했다.
관세청은 특별사법경찰권이 있어 밀수나 불법 물품 반입 혐의가 있는 기업이나 개인에 대해 압수 수색을 할 수 있다. 관세청은 과거에도 밀수 혐의가 있는 중견기업이나 개인 사업자를 대상으로 압수 수색을 벌인 적이 있지만 재벌 총수를 직접 겨냥한 것은 처음이다. 재계에선 이번 조사가 항공사나 공항공사 등 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인터넷에 익명으로 폭로된 내용만으로 특정 재벌 일가에 대해 압수 수색을 하는 것은 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관세청은 "의혹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대한항공 조사에 착수한 관세청에 대해 대한항공 팀장급 직원의 증언 형태로 '인천세관 직원들이 송년 모임이나 회식 등을 할 때 대한항공이 밀반입한 고급 양주를 받아 마셨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대한항공 측은 "해당 보도는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관세청에 대해서는 "조사를 받아야 할 판에 '셀프 수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여론의 비판이 일고 있다. 관세청 관계자는 22일 "필요하다면 정식으로 자체 감찰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