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당 오류' 삼성증권 사태가 공매도 폐지 국민청원 등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직원의 단순한 실수로 존재하지 않는 무려 28억주의 유령 주식이 잘못 발행된 증권사 거래관리 시스템을 불신하고, 배당 오류를 모를리 없는 증권사 직원이 501만주나 매도해 주가를 급락시킨 모럴해저드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9일 오후 3시 45분 현재 ‘삼성증권의 시스템 규제와 공매도 금지’를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18만7600명이 참여했다.
금융당국은 삼성증권 배당 오류 사건을 계기로 모든 증권사를 대상으로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없는지 전수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개인투자자들은 이보다 더 나아가 ‘공매도 전면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앞서 삼성증권은 지난 6일 담당 직원의 실수로 우리사주에 대해 주당 1000원 대신 1000주를 배당해 소위 유령주식 28억3000만주가 우리사주 직원들의 계좌에 잘못 입고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주식을 배당받은 직원 중 16명은 무려 501만2천주를 팔아 모럴 해저드 논란이 불거졌다. 이같은 대량 매도로 삼성증권 주가는 한때 11% 급락했고 일반 투자자가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① 들끓는 여론 “공매도 금지하라" vs 전문가들 “자본시장 발전 역행”
개인투자자들은 삼성증권의 배당 오류 사고로 국내 주식시장에서 불법인 ‘무차입(네이키드) 공매도’가 가능하다는 허점이 드러났다고 보고 있다. 이사회 의결 등 법절차를 밟지 않은 유령주식 28억주가 컴퓨터 클릭 몇번으로 발행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을뿐 아니라 일부 직원은 실물도 없는 잘못된 배당 주식을 매도(결과적으로 무차입 공매도)해 주가 급락을 이끄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무차입 공매도는 보유하지 않는 주식을 먼저 판 뒤 결제일 전에 시장에서 해당 주식을 사서 매수자에게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투기에 의한 결제 불이행 등의 위험을 우려해 국내에서는 무차입 공매도를 금지하고 있다.
삼성증권 직원 16명의 501만주 매도는 법으로 금지된 ‘무차입 공매도’에 해당한다.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빌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매도 주문을 냈기 때문이다. 주식을 먼저 빌린 뒤 팔고 나중에 주식을 사서 갚는 합법적 차입 공매도와 차이가 있다. 국내에서는 2000년 우풍상호신용금고의 결제불이행 사건을 계기로 무차입 공매도가 금지됐다. 무차입 공매도는 전 세계적으로도 강도 높은 규제 대상이다. 미국도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시장 조성 등 특수한 상황에만 허용하고 있다.
개인투자자들은 삼성증권 사태 이전부터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공매도가 주가 왜곡을 유발한다며 무차입 공매도는 물론 차입 공매도도 전면 폐지하라고 줄곧 주장해왔다. 삼성증권의 배당 오류 사고는 공매도 폐지론자들을 들고 일어나게 하는 트리거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공매도 제도의 존립과 연결짓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은태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장은 “이번 사고의 본질은 공매도 문제가 아니라 개인 직원 실수로 법적 절차도 없이 새로운 주식이 발행되고 그 주식이 매매되는 거래관리 시스템의 문제”라며 “공매도를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삼성증권 전략기획실에서 일한 바 있는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한심한 사건이긴 하지만 유가증권 거래 시스템 전반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공매도 제도까지 들먹일 일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공매도 제도를 둘러싼 오랜 공방 속에 역기능 못지 않게 순기능을 무시해선 안된다는 연구도 적잖이 나왔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박사는 지난해 3월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공매도 제도는 부정적인 정보가 주가에 반영되는 주된 경로로 작용함으로써 주식 시장의 정보 효율성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주식시장의 버블이 과도하게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는 순기능도 있다”고 주장했다. 황 박사는 지난해 실증 분석을 통해 공매도가 금지될 경우 주식시장 유동성이 축소되고 변동성이 줄어들 가능성이 커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공매도를 원천 금지하게 될 경우 롱숏펀드, 헤지펀드 등의 운용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금융당국은 공매도 역기능 부각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주식 시스템의 문제로 재발 방지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며 “공매도 자체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공매도 반대 여론이 크게 일고 있어 이번 사건과는 별개로 고민해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② 증권업계 “증권사 내부통제 시스템만 개선해도 해결될 일”
증권업계에서는 현실적으로 삼성증권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제대로만 갖췄어도 이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삼성증권은 배당 업무를 총괄하는 직원이 한명 뿐이고, 이 직원은 우리사주에 대해 배당 1000원 입금이 아닌 배당 1000주 입고를 눌렀다. 또 관리자급 직원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승인 버튼을 눌러 우리사주 직원들 계좌로 존재하지도 않는 총 28억1000주가 잘못 입고됐다.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실무 담당자가 배당 입금 절차를 실행할 때 실수를 막을 수 있는 다중 장치를 두는 것만으로도 이번과 같은 황당한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말했다. 예컨대 다른 대형 증권사의 경우 주식으로 배당을 교부할 때 배당하려는 주식 총량이 정확한지를 재차 확인하는 팝업창이 뜬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번 삼성증권 배당 오류 사고에선 배당주식 교부 총량이 발행주식 총수를 넘어가는데도 그대로 지급됐다”면서 “지급 직전 ‘입고 주식이 맞습니까?’ 혹은 ‘발행주식총수의 몇 퍼센트를 넘어가는데 맞습니까?’라는 식의 팝업창만 떴어도 이번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우리사주 배당을 할 때 주식 배당과 현금 배당의 계좌를 별도로 분리해두면 ‘주’와 ‘원’을 혼동하는 일이 발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금융감독원은 삼성증권을 비롯한 증권사가 상장회사로서의 배당 업무, 투자중개업자로서의 배당업무를 같은 시스템 아래 두고 있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③ 주식교부 시 무조건 예탁원 통하는 방안도 검토될 듯
금융당국은 증권사 거래관리 시스템 전반을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원승연 금감원 부원장은 “전반적으로 점검해서 제도 자체를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주식 교부 시 예탁결제원, 한국거래소까지 거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증권 사태를 보면 증권사는 우리사주조합에 대한 주식배당 형태로 장중 유령주식을 찍어내 매도한 뒤, 장 마감 전에만 매수하면 들키지 않고 주가 조작이 가능했다. 증권사 직원 여러명이 악의를 갖고 주식을 교부하면 내부 통제 장치 마련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애널리스트 출신의 한 투자자문사 대표는 “사실 이번 삼성증권 사태는 내부 통제 장치만 강화해도 재발을 막을 수 있는데, 여론은 ‘너희를 어떻게 믿느냐’에 가깝다”면서 “이 정도로 끝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도 “증권사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언제든 악의를 가지고 시장을 왜곡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며 “우리사주 배당 과정에서도 주식을 교부할 권한을 증권사에 온전히 맡기기보다 한국거래소나 예탁결제원의 승인을 거치도록 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