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쌓은 노하우 공개하라니" 삼성전자, 국민권익委로 달려가 행정심판 제기

조선일보
  • 박순찬 기자
    입력 2018.04.06 03:09

    고용부·삼성 '제조라인' 공개 공방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의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 생산 시설의 작업 현황이 담긴 보고서를 잇따라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이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6개월마다 주요 사업장의 작업 환경을 살핀 결과가 담겨 있다. 고용부는 "산업재해 입증에 필요한 정보를 적극 공개해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를 앞세우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해당 자료에 각 공장의 구조와 공정(工程)뿐 아니라 사용하는 주요 화학제품 이름까지 나와 있어 어렵게 쌓은 제조 노하우가 경쟁사에 새 나갈 가능성이 있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보고서 공개를 막기 위해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제기한 상태다.

    고용부, 삼성전자 공장 보고서 잇단 공개

    삼성전자의 작업 환경 보고서 공개 논란은 지난 2월 대전고등법원의 판결로 시작됐다. 삼성전자의 온양 반도체 조립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한 근로자의 유족이 2016년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기업 비밀'이란 이유로 공개 불가를 결정했지만 항소심에선 유족 손을 들어줬다.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문제는 고용노동부가 산업재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요청에도 잇따라 보고서 공개를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재판부가 공개하라고 결정한 온양 공장 외에 다른 삼성전자 공장의 작업 환경 보고서 공개도 잇따라 허용하고 있다. 실제로 JTBC의 한 PD가 삼성전자 온양 공장뿐 아니라 기흥·화성·평택 반도체 공장, 구미 스마트폰 공장의 작업 환경 보고서까지 달라며 정보 공개를 청구하자 고용부는 이를 모두 허용했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일했던 한 근로자는 아산 탕정의 LCD(액정 표시 장치) 공장 보고서를,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모임인 반올림 소속의 노무사도 경기도 기흥·화성 반도체 공장 정보를 요구해 모두 정부의 허락을 받았다. 현재 고용부에서 관련 분야를 총괄하는 박영만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은 삼성전자 백혈병 소송에서 노동자 측을 변론했던 변호사 출신이다.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는 정부의 잇따른 보고서 공개 결정에 곤혹스러워하며 이를 막기 위한 행정 절차를 밟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보고서가 정보 공개 신청자에게 전달되기 하루 전인 지난달 27일 국가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급하게 정보 공개 집행 정지 신청을 냈다. 권익위는 "자칫 해당 정보가 공개돼 행정심판에서 다툴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며 이를 곧바로 받아들여 현재 공개가 보류된 상태다. 삼성전자도 지난달 30일 경기도 수원지법에 정보 공개를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냈고 이달 2일에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도 행정심판을 제기한 상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산업재해 입증을 위한 유족들의 요청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할 계획이지만 영업 비밀과 관련된 내용 공개는 제외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영업 비밀까지 달라니…"

    삼성전자는 소송 대상이었던 온양 반도체 조립 공장뿐 아니라 기흥·화성·평택의 첨단 반도체 공장의 작업 환경 보고서가 외부에 공개될 경우 제조 기밀이 국내외 경쟁사에 유출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보고서에는 반도체 생산 라인의 구조와 층(層)수, 공정 배치도 등이 담겨 있어 경쟁 업체의 엔지니어들이 이를 토대로 주요 설비의 배치와 설치 대수까지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반도체 생산 공정에 쓰이는 화학물질의 상표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는 것도 큰 부담이라고 주장한다. 특정 공정에서 어떤 브랜드의 웨이퍼(반도체의 원료인 둥근 원판) 세정제를 쓰는 것도 기밀로 분류되는 제조 노하우라는 뜻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제조 기밀 유출을 우려해 지난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반도체 공장 보안을 강화하고 외부인의 생산 라인 방문을 일절 금지해왔다. 해외 기업인은 물론 국가 수반급 인사가 삼성전자 사업장을 방문해도 제한된 시범 생산 라인만 공개할 정도다. 서울대 공대 김재정 교수는 "특정 반도체 장비를 어떻게 배치하고, 특정 화학약품을 쓴다는 것은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중요한 기밀"이라며 "삼성은 모든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인 만큼 정부가 기업 경쟁력을 해칠 수 있는 일에는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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