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의 자진 사퇴 선언은 13일 오전 삼성전자가 역대 최고의 분기 실적을 발표한 지 1시간 30여 분 만에 이뤄졌다. 자신이 맡고 있는 반도체 부문이 역대 최고의 호황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깜짝 퇴진 의사를 밝힌 것이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계열사는 물론, 삼성전자 사장들도 사내 게시판으로 (권 부회장의 사퇴를) 처음 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권 부회장은 "조만간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이사진에게 사퇴 결심을 전하며 이해를 구할 예정"이라며 사전 논의가 없었다고 밝혔다. 삼성 경영진 중 맏형 격이었던 권 부회장의 사퇴로 삼성전자는 물론 삼성 계열사 전체에 대대적인 쇄신 인사와 조직 개편이 단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그룹 전체로 인사 태풍 번지나
권 부회장은 자신의 사퇴가 '삼성전자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의 발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저의 사퇴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던 것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서 "지금 회사가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또 "저의 사퇴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한 차원 더 높은 도전과 혁신의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고도 했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올 들어 사상 최고 실적을 잇따라 경신하는 와중에도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투병을 시작한 이후 3년 넘게 대규모 인사를 하지 못한 데다 그룹 차원의 전략과 인사를 총괄하던 미래전략실까지 해체되면서 조직이 정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으로 대규모 기업 인수·합병(M&A)이나 투자가 미뤄지며 미래 대비를 못 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교체 대상인 계열사 CEO들이 계속 유임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권 부회장이 자진 사퇴라는 충격 요법으로 다른 CEO들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권 부회장의 사퇴는 대규모 인사와 조직 개편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우선 반도체 부문 대표이사로는 김기남 반도체 총괄 사장, 전영현 삼성SDI 사장이 거론된다. 또 권 부회장이 맡고 있는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등 전자 계열사는 물론 금융 계열사 CEO들도 잇따라 퇴진 또는 연쇄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인사 수요가 큰 게 사실"이라면서 "다만 전자와 물산·금융 계열사끼리 묶어서 소그룹화하고 전략과 인사 중심의 컨트롤타워를 둘 것이라는 일각의 조직 개편 시나리오는 총수 부재 상황에서 빠르게 진행되기는 힘든 작업"이라고 말했다.
◇사상 최대 실적 또 경신…'반도체 착시' 우려 목소리도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에 매출 62조원, 영업이익 14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3분기까지의 누적 영업이익만 38조5000억원으로 이미 연간 기준 최고 기록이었던 2013년 전체 영업이익 36조7900억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삼성 안팎에서는 삼성전자의 호실적에 '반도체 착시'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전체 영업이익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사업부는 실적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증권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3분기에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가전·TV 등 반도체를 뺀 모든 사업 부문에서 전 분기보다 실적이 악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스마트폰 부문은 영업이익이 지난 분기 4조600억원에서 3조원대 초중반, 디스플레이 부문은 1조7100억원에서 9000억원 수준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스마트폰과 가전·TV, 디스플레이 등은 이미 중국 업체들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상황이어서 반도체처럼 높은 수익성을 내기 힘들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사업은 한번 경기가 꺾이면 급격히 실적이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가트너도 12일 "올해 전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이 4111억달러(약 464조원), 내년 4274억달러까지 성장한 뒤 2019년에는 감소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 문제는 반도체를 이을 만한 미래 사업이 없다는 것이다. 권 부회장도 "지금 회사의 실적은 과거에 이뤄진 결단과 투자의 결실일 뿐"이라고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권 부회장이 지금이 엄중한 상황이라고 얘기한 것도 미래를 대비해 성장 동력을 발굴하거나 선제적인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위기감의 표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