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근무. 공휴일과 토요일은 정상 근무. 일요일도 선택적 출근. 저녁 식사 시간은 30분만. 게임 출시 지연되면 수당 반납.”
지난달 중견 게임사(社) 위메이드는 개발 자회사 위메이드아이오에 이런 근무 지침을 통보했다. 자회사가 개발 중인 신작(新作) 게임 이카루스M을 완성하는 11월 말까지 직원들에게 높은 근무 강도의 ‘크런치(crunch) 모드’로 전환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으드득 부서지는 소리’라는 뜻의 크런치는 게임업계에서는 신규 게임 출시 전에 실시하는 강도 높은 야근과 철야 근무를 말한다.
자회사 직원들이 즉각 반발했고 위메이드 측은 장현국 대표가 사과 이메일을 보내고 크런치 모드를 전면 백지화했다. 위메이드 측은 “연말 출시 예정인 신작 게임을 성공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자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게임업계에서는 “신작을 앞두고 개발자들을 쥐어짜고 개발사를 하도급 업체처럼 부리는 고질병이 불거진 것”이라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구로 등대’와 ‘판교 등대’의 엇갈린 운명
게임업계에서 과도한 업무와 야근 문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1970·80년대 공단 근로자들의 노동 착취 못지않은 일들이 대표적인 IT 기업에서도 흔히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게임 개발자 A(31)씨는 2년 전 회사에서 일하다가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는 “6개월 내 신작 모바일 게임을 출시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틀 밤을 새우고 3~4시간씩 잠자는 생활을 몇 주 했다”며 “회사에서 깜빡 조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췄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에서 1주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며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24시간 연속 근무는 기본이고 36시간 이상 일해야 ‘야근’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야근이 많은 일부 게임업체를 두고 ‘구로 등대’ ‘판교 등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한밤중에 불이 환히 켜진 게임업체의 사옥을 빗대 구로구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게임업체 넷마블을 ‘구로 등대’, 판교에 사옥이 있는 위메이드를 ‘판교 등대’라고 부른다. 넷마블은 작년에 직원 3명 사망하며 혹사 논란이 일자 지난 2월 야근과 주말 근무를 폐지했다. 하지만 위메이드처럼 규모가 작은 게임업체들은 경영 상황이 나빠지면서 근무 조건이 예전보다 더 열악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게임업체의 실적 양극화가 한 요인이다. 국내 게임업계는 넥슨·엔씨소프트·넷마블 등 ‘빅3’가 각각 연 1조~2조원대 매출에 수천억원씩 흑자를 내는 반면 중소·중견 게임업체들은 줄줄이 매출·영업이익이 줄거나 적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번에 논란을 일으킨 위메이드도 작년에 매출 1080억원에 730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경영난에 허덕이는 중소 게임업체들은 최근 2~3년간 신작 개발팀을 자회사로 분사시키고 있다”며 “신작이 실패하면 직원들은 ‘회사가 문을 닫지 않을까’ 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짧은 기간에 신작 게임 개발 마쳐야…과중한 업무 부르는 게임업계 특성
게임업계에 만연한 야근·철야가 ‘게임’이라는 상품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게임업체 대표는 “게임은 영화 제작과 유사하다”며 “수십억원을 들여 최고의 완성도를 갖춘 신작을 만들어도 출시 시기를 놓치면 흥행에 실패한다”고 말했다. 과거 PC 온라인 게임은 길게는 5~6년 동안 개발하면서 완성도에 치중했지만, 게임 유통 기간이 짧아진 모바일 게임은 일부 대작을 빼고는 대부분 3~6개월 동안에 개발을 완료해야 한다. 또 심야나 새벽에 이용 장애가 발생했을 때 곧바로 대응을 못 하면 이용자들이 무더기로 이탈하기 하기 때문에 게임업체 직원들은 24시간 긴장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열악한 근무 환경의 주요 원인이다.
게임업계에서는 “가혹한 근무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함께 제대로 된 보상 시스템으로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소 게임업체에서 일하는 개발자 B씨(33)는 “빅3는 신작 개발을 완료했을 경우 수억원대 성과급을 주기도 하지만 중소 게임업체들에는 남의 이야기”라며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는 신작의 성공 확률이 낮아지면서 업무 강도에 비해 보상이 적은 탓에 직원들의 불만이 팽배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