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대우조선 채무 조정안에 대한 찬성 여부를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국민연금은 17일 대우조선의 첫 사채권자 집회가 열리기 9시간 30분 전에야 채무 조정안에 찬성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막판의 막판까지 몰려 자정을 넘겨 '심야 발표'라는 이례적인 모습까지 연출했다. 뻔히 보이는 '답안'을 놓고 시간을 너무 끌어, 금융권에선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 찬성 트라우마 때문에 '의사 결정 장애'에 걸린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까지 나왔다.
금융위원회와 대우조선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회사채를 포함한 채무 조정 방안을 발표한 것은 지난달 23일인데 최대 회사채 채권자인 국민연금은 20여일간 시간을 보내고 '초읽기' 상황에 몰려서야 '찬성' 결정을 내렸다. 결국 법정관리라는 파국은 피했지만, 세계 2위의 조선소 경영 정상화 방안을 이런 식으로 시간에 쫓겨 처리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국민연금이 다음 달 9일 대선 이후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채무 조정을 미루자는 태도를 취한 것이 발단이 됐다.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노후자금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면서 "오는 21일 만기인 회사채 4400억원은 일단 정상 상환한 뒤에 논의하자"고 했다. 대선 전에는 결정을 내리기 싫다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었다.
시간에 쫓긴 금융위와 산은은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면 국민연금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국민연금을 강하게 압박했다.
국민연금 안팎에서 "협상이라기보다는 항복을 요구하는 것 같다"는 불평이 나왔다. 금융권 관계자는 "채권자는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리한 트집 잡기로 법정관리를 자초한다는 식으로 몰아세우는 건 심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13일부터 본격화된 협상은 양측의 '꼬투리 잡기'로 시간을 허비했다. 지난 16일 밤늦게 열린 투자위원회가 단적인 예다.
산은은 만기 연장 회사채 상환과 관련해 "대우조선이 청산되더라도 회사채 채권자들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돈 1000억원을 별도 계좌에 넣어 담보로 제공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는데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그렇게 돈을 빼놓으면 '사해(詐害)행위'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시비를 걸었다. '사해행위'란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기 위해 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빼돌리는 것을 말한다.
산은이 "대우조선이 청산되면 어차피 받게 돼 있는 돈인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발하는데도 납득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고 산은 관계자는 전했다. 산은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끝까지 고심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데 집착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