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직장인 이선영(가명)씨는 계좌이동제 사이트를 활용해 옛 통장에 묵힌 돈 10만원 정도를 찾았다는 동료의 자랑에 솔깃해 관련 사이트를 찾았다. 이씨는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공인인증서가 필요하다'는 안내부터 뜨더라. 정부가 공인인증서 없앤다고 홍보한 지가 언제인데, 금융당국이 주도해서 만든 사이트부터 '인증서 중독'에 빠진 모습이 답답했다"고 했다. 2015년부터 단계적으로 서비스를 확대 중인 계좌이동제는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이 대표적인 금융개혁의 성과로 내세우는 프로젝트다.

2013년 이른바 '천송이 코트' 논란 이후, 정부가 개혁해야 할 규제의 상징처럼 내세워온 공인인증서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 소비자 불편이 여전히 크다는 지적이다. 중국인들이 국내 드라마의 여주인공 '천송이'가 입은 코트를 사려고 했다가 공인인증서 때문에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당시 정부는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인터넷진흥원 집계 결과, 공인인증서 사용자는 2013년 말 3001만명에서 해마다 증가해 작년 말 3545만명을 기록했다. '천송이 코트' 사건 직후인 2013년 말과 비교하면 사용자가 500만명 이상 증가한 셈이다. 왜 공인인증서는 줄어들 조짐은커녕 '증식'만 하는 것일까.

◇공인인증서 사용자 수, 3년새 500만 늘어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자랑하는 공인인증서', '공인인증서 때문에 (화가 나서)수명이 줄어들고 있어요'…. 공인인증서에 대한 분노의 글은 트위터·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 끊이지 않고 올라오고 있다.

금융위는 2014년 초에 '천송이 코트' 논란이 일자 이듬해 3월 전자금융감독규정을 고쳐 인터넷뱅킹·쇼핑을 할 때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 할 의무를 없앴다. 하지만 PC를 쓰는 인터넷뱅킹은 대부분 여전히 공인인증서가 있어야 이체 등 주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정부의 온라인 서비스도 공인인증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국세청의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나 행정자치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민원 포털 '민원24' 등이 대표적이다. 공인인증서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자, 대선 후보인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지난 2일 '공인인증서 의무화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PC를 통해 참여하길 원한다면, 이 경우에도 공인인증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실정이다.

◇보안 책임을 소비자에 전가하는 수단… 부처는 '떠넘기기'

금융회사들은 공인인증서를 고집하는 이유로 정보 유출 등 사고가 날 위험이 너무 큰 탓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금융회사들이 2002년부터 10년 넘게 보안 시스템을 인증서 중심으로 구축했기 때문에, 이 틀을 갑자기 벗어던지기는 불안하다는 것이다. A은행 보안 담당 부장은 "정보 유출 같은 사고가 한번 발생하면 CEO(최고경영자)가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갑자기 새로운 보안 시스템을 도입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인터넷상의 신분 확인 대안 중 하나로 2006년 도입된 '아이핀'의 경우 2013년 부정 발급 사건이 발생하는 등 보안 문제가 계속 제기되면서 사용률이 여전히 부진하다.

금융 사고의 책임을 금융회사가 아닌 소비자가 지도록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금융회사들이 공인인증서를 선호한다는 지적도 있다. 공인인증서는 기본적으로 '금융 소비자 A는 A가 맞음'을 소비자 자신이 입증하도록 한 도구여서 도용(盜用) 등에 따른 책임을 소비자가 지는 경우가 많다. 보험 등을 통해 정보 보안에 대한 책임을 기업이 많이 떠안는 미국 등과 크게 다르다.

공인인증서와 관련한 규정이 여러 법에 흩어져 있어 일괄적으로 없애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금융위는 전자금융감독규정을 2015년 바꿨지만, 국세청·행정자치부 온라인 서비스와 관련해서는 행정자치부 소관인 전자정부법이 공인인증서 사용을 여전히 의무화하고 있는 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무원들은 '주무 부처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급급한 경우가 많다. 공인인증서와 관련해 미래창조과학부에 문의했더니 "전자정부법은 행정자치부 소관"이라는 답이 돌아왔고, 국세청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명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