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시작된 조선·해운업발 고용 한파가 가계의 소득을 뒷걸음질치게 했다. 가계의 소득 정체는 사상 최악의 소비 침체를 낳고 있다. 성장의 과실이 가계보다 기업에 쏠리고, 가계는 과도한 빚에 시달린 나머지 소비 여력이 바닥나고 있어 가계발 '소비 절벽'은 앞으로 더 심화될 전망이다. 고용 악화→소득 감소→소비 침체의 악순환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통계청이 24일 발표한 '2016년 가계 동향'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제는 지난해 2.7%의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가계 평균 소득은 439만9000원으로 0.6% 늘어나는 데 그쳤다. 물가 상승분을 뺀 실질소득은 1년 전보다 0.4% 줄었다. 2009년(-1.5%) 이후 7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지갑이 얇아지니 씀씀이도 움츠러들었다. 가구당 월평균 소비 지출은 255만원으로 1년 전보다 0.5% 줄었다. 물가 상승분을 뺀 실질 소비 지출은 1.5%가 줄었다. 소비 지출 금액이 감소한 것은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우리 국민은 소득이 줄어도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소비를 줄이지는 않았다"며 "이제는 그 기대마저 무너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계소득 뒷걸음질
지난해 가계소득을 뒷걸음질치게 한 주요인은 전체 소득의 67%를 차지하는 근로소득의 증가율이 2015년 1.6%에서 지난해 1.0%로 떨어진 것이다. 물가 상승을 반영한 실질 근로소득의 증가율은 0%였다. 임금이 사실상 제자리였다는 얘기다.
김보경 통계청 복지통계과장은 "지난해 조선업·해운업 등 구조조정의 여파가 컸다"고 말했다. 가계소득의 정체는 '소비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의 평균 소비성향은 71.1%로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우리 국민이 쓸 수 있는 돈 100만원 중 71만1000원만 썼다는 뜻이다. 김성태 KDI(한국개발연구원) 거시경제연구부장은 "경제성장의 과실이 일부 대기업에 쏠리는 측면도 있다"며 "기업의 수익이 근로자까지 연결되는 통로가 막혀 동맥경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계층 간 소득 격차 악화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저소득층이 먼저 맞으면서 꾸준히 개선돼온 분배 지표가 지난해엔 악화했다. 지난해 하위 20%의 소득(월 145만원)은 1년 전에 비해 5.6%나 줄었다. 반면 상위 20%의 소득(835만원)은 2.1%가 늘었다. 이처럼 소득 격차가 더 벌어지면서 하위 20% 가구 대비 상위 20% 가구의 소득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소득 5분위 배율은 지난해 4.48을 기록, 2015년(4.22)보다 나빠졌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경기 침체로 임시 일용 근로자가 줄었고 영세 자영업자들이 늘면서 과당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나 홀로 자영업자'는 2015년 12만명 줄었다가 지난해 2만7000명이 늘어났다. 은퇴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대거 창업 전선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세 자영업자의 창업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 은퇴자가 대거 저소득층으로 편입되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그동안 정부가 복지 분야에 예산을 많이 썼지만 결국 고용 시장을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다"며 "기업들이 고용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은 '초절약' 모드
우리 국민은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초절약' 모드에 들어갔다. 지난해 식료품과 의류·신발 소비가 각각 1.3%, 2.4% 줄었다. 자동차 구입이 4.5% 줄었고 연료비 지출도 7.1% 감소했다. 휴대전화도 덜 바꿔 통신 지출도 2.5%가 줄었다. 심지어 어지간해선 손대지 않는 교육 지출도 0.4% 줄었다.
소득이 줄었지만 지출은 더 줄이면서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는 흑자액이 늘어났다. 가계 수지에서 흑자액이 103만8000원을 기록, 전년도에 비해 3.8%나 늘어났다. 특히 4분기 흑자액은 전년 대비 9.7%나 늘어나 '불황형 흑자'가 더 심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올해가 더 걱정이라고 말한다.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소비 절벽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소비가 줄면 성장 동력까지 꺼져 장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외환 위기나 글로벌 금융 위기 땐 단기적인 위기라 금방 경기가 다시 좋아졌지만 최근 한국 경제는 선순환 구조가 끊어진 데다 탄핵 정국 등 각종 악재가 얽혀 있어 단기간에 호전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올해는 유가 상승으로 물가가 오르고 금리도 올라가 실질소득은 더 줄 것으로 예상된다"며 "일본처럼 장기 불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