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상가. 3층에 '디어블랑제'라는 빵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66㎡(약 20평) 넓이의 실내엔 믹서, 발효 기계, 급속 냉동고 등 제빵 설비가 가득하다. 이곳에선 매일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 정항모(50)씨가 쉴 새 없이 빵 반죽을 만든다. 작업장 한쪽에는 '샹도르' '뉴욕제과' '깜빠뉴' '빵85' 등 빵집 이름이 적힌 반죽 통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서울 도봉구·노원구 등 동네 빵집 20곳이 참여하는 공동 빵집 브랜드 '디어블랑제'의 작업장이다. 디어블랑제는 독립된 사업체로, 회원 빵집에 반죽을 제공하는 '공동 공장' 역할을 한다.
매일 생산하는 반죽은 빵 1000개 이상을 만들 수 있는 양으로, 매일 오후 12시~오후 3시 사이에 각 빵집으로 배달된다. 빵집들은 이 반죽으로 각자의 개성을 곁들여 특색 있는 빵을 만든다. 반죽을 하는 정씨도 디어블랑제에 참가한 빵집 사장 출신이다.
디어블랑제가 생긴 2012년, 노원구와 도봉구에서만 동네 빵집들이 많을 땐 한 달에 3곳씩 문을 닫았다. 거대 자본에 마케팅이 뒷받침된 프랜차이즈 빵집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디어블랑제 회원인 민부곤(60)씨는 "이대로는 동네 빵집이 전멸할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했다.
뭉쳐야 산다는 걸 절감한 도봉구 빵집 6곳이 우선 모였다. 서울신용보증재단으로부터 1억원을 지원받고, 빵집들도 1300만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발효 기계, 냉장고, 믹서, 작업대 등 각종 제빵 기계를 구입했다. 우리나라의 8번째 제과 명장인 함상훈(59)씨도 함께 참여했다.
디어블랑제는 '비밀 병기'로 발효 빵을 내세웠다. 당시 웰빙 트렌드를 타고 발효 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발효 빵을 만들기 위한 발효 기계는 대당 1500만원이 넘는 데다, 동네 빵집 혼자서 쓰기엔 기계 용량도 너무 컸다. 함씨는 "조그만 동네 빵집이 발효 기계를 들여놓는다는 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라고 했다. 디어블랑제는 공동 작업장에서 함께 쓸 발효 기계 2대를 3000만원에 구입했다.
소화가 잘되는 발효 빵을 찾는 손님이 늘자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디어블랑제에 참가하겠다는 동네 빵집도 대거 늘었다. 경기도 의정부와 서울 강북구 빵집까지 가세해 동네 빵집 총 20곳이 참가하고 있다.
동네 빵집들은 디어블랑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디어블랑제가 수익을 안 남기는 만큼 싼 가격에 반죽을 주기 때문이다. 각종 포장재와 재료도 공동 구매해 혼자 살 때보다 10%가량 싸게 산다.
회원 빵집들의 매출도 눈에 띄게 늘었다. 마이스터제과제빵학원 염경훈(52) 원장은 "지난해엔 그 전년과 비교해 각 빵집의 매출이 평균 약 20% 올라갔다"고 말했다.
김병학(65)씨는 "프랜차이즈는 빵이 다 만들어진 상태로 오지만 동네 빵집은 반죽을 직접 만들어야 해 시간도 걸리고 인건비도 많이 나가는데, 지금은 그 시간만큼을 다른 제품을 만드는 데 쓰고 있다"며 "함께 힘을 모으니 살 만해져서 빵을 더 즐겁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