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증권사·자산운용사·선물거래사 등을 대변하는 금융투자협회가 은행권을 연거푸 자극하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시장에서 두 업계의 기싸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정유년(丁酉年) 벽두부터 시작된 금투협의 은행권 공격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며 총대를 멘 금투협을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사연 때문일까요.
◆ 올해 벌써 세번 은행권 자극한 금투협
금투협의 올해 첫 은행권 자극은 지난 1월 18일 발표한 ‘개인의 금융투자 실태조사 분석 결과’였습니다. 금투협이 자본시장연구원에 의뢰해 진행한 이 조사 결과를 두 문장으로 요약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과거에는 예·적금을 선호했으나 현재는 주식·펀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은행보다 증권사 직원의 전문성에 거는 기대감도 커졌다’ 정도가 됩니다.
이 조사 결과를 접한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은행 직원 입장에선 아무래도 의도가 찝찝하게 느껴지지만, 객관적인 설문조사 결과라고 하니 딱히 뭐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자극은 금융권에서 이른바 ‘검투사’로 통하는 황영기 금투협 회장이 직접 주도했습니다. 황 회장은 이달 6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정부는 증권사의 법인 지급결제와 외국환 거래 업무를 허용해야 한다. 증권업계에만 적용된 차별 규제 뒤에는 은행권의 힘이 숨어있다”며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황 회장은 불합리한 규제를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유하며 정부가 반드시 이를 평탄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금투협 회장 취임 후 지금까지 언론사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증권업계가 은행권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거침없이 주장해왔습니다.
세 번째 자극은 간담회 3일 후인 9일 금투협 기획조사실의 ‘국내 금융산업의 효율성 분석’ 결과 발표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번 분석 결과도 두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국내 은행의 수익성·생산성은 다른 금융업계에 비해 낮은 수준이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과점화된 시장은 경쟁이 부족하고 글로벌 진출도 지지부진하다’ 정도가 됩니다. 자극의 강도가 갈수록 더 세지는 듯 합니다.
정수섭 금투협 기획조사실장은 “은행들은 그동안 자체적인 생산성·비용 효율성 제고에 주력하기보다 펀드 판매, 일임업 등 타금융업계의 업무를 침범해왔다”며 “주요 은행 대부분이 지주사 체계 하에 있어 계열사들과의 협업이 가능함에도 자신들의 사업 확대만 신경쓴다”고 비판했습니다.
◆ “은행이 자산운용까지?…결사반대!”
증권사보다 덩치가 월등히 큰 은행들이 주도하는 국내 금융시장의 분위기상 정부의 정책 방향도 은행 중심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 회장과 금투협이 연초부터 업계 보호에 강경하게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금융업계 관계자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증권업계 전반의 위기감에 임기 마지막 해를 맞이한 황 회장의 절박함이 합쳐진 결과물이라고 분석합니다. 특히 관계자들은 “오는 10월로 예정된 정부의 신탁업 제도 개편을 둘러싼 두 업계의 힘 겨루기가 최근 금투협의 잇딴 도발을 야기한 가장 큰 이유”라고 입을 모읍니다.
신탁(信託)은 투자자가 금융회사에 돈이나 부동산 등을 맡기면 해당 금융회사가 이를 운용·관리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금융당국은 신탁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신탁업법을 자본시장법에서 분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실무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해 6월까지 신탁업법 제정안을 마련하고, 10월 정기 국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죠.
이중 두 업계의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부분은 ‘운용’입니다. 은행들은 투자자의 돈을 직접 운용해 수익을 내는 ‘불특정 금전신탁’의 부활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불특정 금전신탁은 지난 2004년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됐습니다. 만약 이것이 되살아나면 은행 입장에서는 사실상 자산운용업에 진출할 명분을 얻게 됩니다.
금융투자업계는 정부의 이번 신탁업법 분리 과정에서 은행권의 뜻대로 불특정 금전신탁이 부활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시장에서 막강한 영업망과 자본력으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은행들이 자산운용업까지 침범할 경우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금융당국이 예민한 사안임을 감안해 “불특정 금전신탁 부활 문제는 이번 제도개선 방안에 포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은행권의 로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며 “시기만 조금 늦어질 뿐 그들(은행)이 원하는 것(불특정 금전신탁)을 기어코 얻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