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두 사람 다 화풍이 매우 도회적이랄까. 디테일 하나하나가 세련되었다. 문장으로 비유하자면, 문체가 탄탄하면서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느낌이 없다. 소탈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이런 성향은 어쩌면 아오야마의 바에서 오랜 세월 술을 마시는 사이에 길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도쿄행 비행기에서 꺼내 든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 등장한 일화다. 하루키는 ‘같은 공기를 마시는구나, 라는 것’이란 제목의 글에서 자신이 줄곧 도쿄 ‘아오야마(青山)’ 생활권에 살고 있고, 가깝게 지내는 화가 와다 마코토, 안자이 미즈마루 역시 그렇다고 소개했다. 세 사람의 인연을 소개하는 형식이지만, 글의 핵심은 아오야마 예찬이었다. “머물기만 해도 도회적이고 세련된 감각을 체득할 수 있는 동네라니!” 지난해 12월 26일 오후 ‘예술과 패션의 거리, 일본 최신 트렌드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불리는 아오야마를 찾아갔다.
◆ 힙스터들의 메카, 아오야마·오모테산도…운동화부터 셔츠까지 맞춤으로
도쿄 미나토구에 속해 있는 아오야마는 신주쿠에서는 동남쪽으로 4㎞가량 떨어져 있다. 신주쿠산초메(新宿三丁目)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4분가량 달려 메이지진구마에(明治神宮前駅)역에 내렸다. 메이지진구마에역부터 오모테산도(表参道)역으로 이어지는 대로변과 뒷골목, 아오야마잇초메(青山一丁目)역 부근까지 힙스터(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들이 좋아할 만한 패션 숍, 아기자기한 카페, 톡톡 튀는 레스토랑이 펼쳐진다. 도쿄 올림픽 전후로 디자이너들이 아오야마 지역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메이지진구마에역에서 오모테산도역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은 경사가 어느 정도 있는 언덕길이었다. 왕복 6차선 대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니 느티나무 길 양쪽으로 루이비통, 디올, 샤넬, 구찌, 버버리, 프라다, 까르띠에 등 유명 럭셔리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대표 매장)가 눈에 들어왔다. 긴 오르막길 주변에 유명 브랜드가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파리 샹젤리제 거리 같았다. 유명 건축가 안도다다오가 설계한 럭셔리 쇼핑몰 ‘오모테산도 힐즈(Omotesando Hills)’도 만날 수 있었다.
하일라이트는 명품 거리가 아니었다. 대로변 주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 곳곳에 트렌디한 패션 숍, 카페, 레스토랑이 보였다. 왜 이곳이 예술가들과 패션 피플의 사랑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홍대 주변에 자리잡은 상수, 합정, 연남동과 비슷했다. 뉴욕 쉐이크쉑 버거 아시아 1호점, 샌프란시스코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인 블루보틀 2호점이 자리잡은 곳도 이 지역이다.
여러 패션 숍 중에서도 커스터마이징(custermizing·맞춤제작) 마케팅으로 고객에게 다가서는 숍들이 인상적이었다. ‘캣 스트리트(Cat Street)’ 끝에 위치한 ‘화이트 아뜰리에 바이 컨버스(white atelier by converse)’가 특히 붐볐는데, 지하 1층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한 운동화를 주문하려는 관광객, 현지인들 때문이었다. 베이스 모델(기본형)을 선택하고 다양한 차트를 보면서 운동화에 넣을 프린트(문양)를 고른 뒤 운동화끈과 장식물(stud·스터드)까지 선택할 수 있었다. 가격은 10만원대 안팎. 매장 직원은 “제작에 보통 3시간 정도 걸리는데, 기다리는 고객이 많다”고 했다.
오모테산도역쪽으로 더 올라가면 ‘프리맨스 스포팅 클럽(freemans sporting club)’이라는 편집숍이 나온다. 지하 1층은 레스토랑, 지상 1층은 스포츠·캐주얼 의류, 2층은 테일러숍, 3층은 바버숍(barber shop)이다. 패션과 미용에 아낌 없이 투자하는 그루밍족(Grooming)을 겨냥한 구성이다. 테일러숍에서는 클래식 화이트, 스트라이프, 체크 무늬 등 다양한 원단을 골라 셔츠를 주문 제작할 수 있었는데, 셔츠 두 벌에 2만4000엔(한화 24만6000원)으로 가격대가 비싼 편임에도 방문객이 많았다. 셔츠 뿐 아니라 빈티지 원단을 사용한 정장도 주문 제작할 수 있었다.
◆ "취향대로 먹는다"…이치란 라멘·800디그리스 피자
하루 유동 인구 40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역 가운데 하나인 신주쿠역 부근에는 커스트마이징으로 즐길 수 있는 먹거리가 많았다.
신주쿠역 동편 출구쪽에 위치한 ‘이치란(一蘭) 라멘’에서는 맛, 맵기, 면의 질김 정도, 고명 등 7가지 카테고리로 나눠서 각각 취향을 반영해 주문할 수 있다. 한 시간가량 서서 기다린 후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종업원이 설문지 같은 것을 작성하라며 손에 쥐여 줬는데, 이게 주문서였다.
예를 들어 “진한 맛에 기름진 정도는 담백하게, 마늘은 조금 넣고 파는 실파로, 챠슈(돼지고기 편육)를 넣고 비밀 소스는 두 배, 면은 질긴 면으로 해주세요!”라고 주문서를 작성한다. 산술적으로 경우의 수만 따지면 1만6200가지 종류의 라면을 주문할 수 있다.
내부도 1인용 칸막이 형식으로 돼 있어 완벽히 개인화된 라면을 대접받는 기분을 들게했다. 각 주문서에 따라 주문된 라면은 해당 손님 좌석 앞에 뚫려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전달됐다. 라면 단품 가격은 910엔(한화 9300원). 반숙 계란 등 사이드 메뉴를 추가하더라도 1만원 수준에서 즐길 수 있었다. ‘나만의 레시피’로 만든 라면이 입맛에 딱 맞았지만, 다른 맛은 어떨지 궁금해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인기 피자 가게 ‘800디그리스 피자(800 Degrees Neapolitan Pizzeria)’는 작년 4월 신주쿠역 근처 쇼핑몰인 뉴우먼(NEWoMAN)에 문을 열었다. 아시아 지역 1호점을 일본 신주쿠에 낸 것이다. 빈 자리가 안보일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5종의 베이스에 40여 종의 토핑을 선택해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었다.
◆ '무브먼트만 20개' 놋토 시계 열풍… 전문가들 "소비자, 능동적으로 변해"
최근 일본 내에서 품귀현상까지 빚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시계 브랜드 ‘놋토(KNOT)’도 마찬가지다. 20여 종의 시계 무브먼트(동력장치)와 200여 종의 시계줄을 자유롭게 조합해 자신만의 시계를 만들 수 있다. 커스텀 오더(custome order) 브랜드 시계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현재 도쿄 기치조지(吉祥寺)와 요코하마, 오사카 등 총 세 곳에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소비 트렌드 전문가들은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을 겪으며 이런 마케팅 전략이 각광받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신중한 소비행태를 보이면서 대량생산된 제품 등 특색 없는 상품·서비스로는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만의 제품을 산다’는 뿌듯함은 커스터마이징 마켓을 견인하는 동력이다.
‘트렌드코리아 2017’의 저자인 이준영 상명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단순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는 커다란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생산의 영역에서 소비자의 목소리가 더욱 강해지면서 많은 기업이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를 창조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더욱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변해가는 소비자를 무시해서는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다”며 “커스터마이징 마켓의 발전과 진화가 대량생산 시대의 근원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