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한화종합화학 공장. '서바이벌(Survival) 100'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을 내걸어 놓고 아침부터 공사가 한창이었다. 생존을 위해 100주일 동안 뼈를 깎는 원가 절감을 하자는 뜻이라고 공장 관계자는 설명했다. 공사는 공장 증설이 아니라 공장 규모를 줄이는 작업이었다. 합성섬유와 페트병의 원료인 PTA(고순도 테레프탈산)를 생산하는 이 회사의 박진현 인사지원팀장은 "21일부터는 연산 45만t 규모의 2공장 가동을 중단할 계획"이라며 "공장 폐쇄를 위해 막판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회사는 이미 작년 10월 연산 40만t규모인 1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원래 연간 130만t을 생산해 왔지만 이제 생산량이 연간 45만t으로 줄어든 것이다. 다음 달 초 1공장을 다시 가동해 생산가능물량을 연 85만t으로 늘릴 계획이지만 공장이 완전 가동에 들어갈지는 미지수다. 업계 관계자는 "이 공장에서 예전처럼 130만t을 생산하는 날이 올 가능성은 제로(0)"라고 말했다.

일부 공장 가동 중단… 상황실 모니터도 'off' - 지난 17일 울산 한화종합화학의 상황실에서 직원들이 컴퓨터 모니터로 생산 상황 등을 점검하고 있다. 중국의 공급 과잉으로 수출이 급감해 가동이 중단된 맨 왼쪽의 1라인 상황 모니터들은 시커멓게 꺼져 있다.
"생존 위해 100주일간 뼈 깎는 원가절감" - 한화종합화학의 공장 밖에는 생존을 위해 100주 동안 뼈를 깎는 원가 절감 운동을 펼치자는 내용의‘서바이벌(survival) 100’현수막이 걸려 있다.

한화종합화학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롯데케미칼 공장도 PTA 생산량을 60%로 줄였다. 이곳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SK유화는 2014년부터 PTA 생산을 중단하고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전남 여수에 있는 삼남석유화학 역시 지난 2012년 초 4개 생산라인 중 1개를 껐고, 올해 1월에 추가로 1개 설비의 가동을 멈췄다.

한때 국내 산업계에서 손꼽히는 캐시카우(현금창출원)였던 석유화학업계가 지금은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PTA는 5년 전만 하더라도 수출액이 연간 45억달러(약 5조원)에 달할 정도로 대표적인 효자 수출 품목이었지만, 작년 수출액은 20분의 1 수준인 1억9000만달러(약 2100억원)에 그쳤다. 글로벌 PTA 수요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이 자국 내 생산을 늘리면서 자급률이 100%를 넘어선 결과다.

석유화학제품뿐만 아니다. 지난달 선박·휴대전화·반도체·자동차 등 우리나라 10대 수출 품목 중 작년보다 수출액이 늘어난 품목은 하나도 없었다. 과거 중국이 10%대 고도성장을 할 때 대중(對中) 수출로 특수(特需)를 누리다가 이제는 중국발 공급 과잉 탓에 생존을 걱정하는 한국 주력 산업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30대 그룹, 성장성·수익성 동반 추락

한국 경제의 주력군인 30대 그룹은 지금 세계 경기 침체, 보호무역주의 확산, 중국의 도전이라는 삼각 파도 앞에 놓여 있다. IMF(국제통화기금)는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을 3.1%로 추정하고 있다. 1996~2006년 평균인 3.6%에 훨씬 못 미친다. 여기에 더해 각국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각국의 수입 규제 건수는 2011년 119건에서 작년 210건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에 세계무역기구(WTO)는 올해 세계 무역 증가율이 1.7%에 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의 추격은 무섭기까지 하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우리 주력 수출 제조업인 조선·철강·화학 등이 밀리는 핵심은 중국 때문"이라며 "중국이 너무 많이 쫓아왔고 IT·자동차까지도 점점 밀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수출이 타격받으면서 30대 그룹의 매출은 줄고, 수익성도 나빠지고 있다. 우리나라 수출은 8월 반짝 반등한 것을 빼면 2014년 12월 이후 9월까지 20개월 마이너스(-) 행진을 하고 있다. 10월에도 갤럭시 노트7 생산 중단 등의 여파로 상순에 18.2% 감소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30대 그룹의 성장성을 보여주는 1인당 매출액은 2011년 10억7993만원에서 작년 9억6866만원으로 줄었다. 수익성을 나타내는 1인당 영업이익도 지난 4년간 1815만원이 줄어 작년 5317만원을 기록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수출 대기업들이 돈을 쌓아두고 투자를 안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요 대기업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실제 어렵다"고 말했다.

"수출 대기업 '낙수 효과' 사라졌다"

과거 수출 대기업은 국내에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낙수 효과'를 줬다. 하지만 18일 본지와 CEO스코어 공동 조사에 따르면, 30대 그룹 일자리는 작년 말 88만명을 정점으로 올 들어 줄어들고 있다. 김현철 서울대 교수는 "수출 기업이 먼저 매출이 줄면서 타격을 입고, 내수에도 영향이 생기고 있다"며 "과거에는 수출이 잘되니 유동성(돈)이 국내로 공급돼 내수도 괜찮았지만 이런 구조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병규 산업연구원장은 "자동차·석유화학 등은 과거 성장 동력이었지만, 지금은 고임금 문제와 전 세계적인 과당 경쟁으로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며 "기존 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