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직장 문화가 바로 혁신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자 7년 차, 30대 후반에 실리콘밸리를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세계 3대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 SAP의 혁신센터를 방문하고 누구나 프로토타입(시제) 앱을 만들 수 있는 도구인 ‘빌드(Build)’도 체험해 봤다.
하지만 취재 기간 내내 유난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사실은 무겁게 짓눌렀던 단어는 ‘하이어라키(hierarchy)’였다. 조직내 계급이나 계층을 뜻하는 이 단어는 주로 계층적인 구조에서 파생되는 수직적 힘의 관계를 뜻한다.
9월 13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산제이 쉬롤레(Sanjay Shirole) SAP(독일 소프트웨어업체) 실리콘밸리 혁신센터장은 “한국이 하이어라키 때문에 혁신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14일 만난 바바 시브(Baba Shiv)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도 “한국은 대학생 선후배 사이에서도 수직적 문화 때문에 혁신이 쉽지 않다”고 했다.
사실 혁신 전문가들의 지적은 내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와 대학생활을 하면서 성장해 30대 후반이 된 나의 모습이었다. 고교 1년차일 때는 선배에게 90도로 인사하고 다녔고 대학 들어가서는 학번이 높은 대학 선배들이 시키면 주말이든 밤이든 집합 장소로 나갔다.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 복무 생활을 말해봐야 무엇하랴.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지않은 사람들이 하이어라키에서 산다. 직장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면 밤 11~12시, 때로는 새벽 2~3시까지 야근하는 A 대기업에 다니는 동생, 주말에도 메신저로 업무 지시를 계속 받는 B 중소기업에 다니는 친구까지.
혁신적 기업으로 평가받으며 직원들에게 후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진 C백화점에 다니는 한 지인의 속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젠 지친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백화점 직원으로 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이어라키로는 혁신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창조적 파괴를 위해 생각할 여유가 없고 하이어라키의 위쪽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미래를 혁신해야 할 우리 세대, 지금의 30대가 하이어라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혁신할 준비가 안돼 있다는 뜻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