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배추밭 곳곳이 마치 분필을 칠한 듯 하얗게 바래 있었다. 지난 7일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말라버린 배추밭에 쪼그려 앉아 우거지로 쓸 배춧잎을 골라내던 이순덕(56)씨는 "올해는 잎이 다 말라버려 우거지거리도 구하기 어려워. 생전 이런 일 없었는데"라고 했다. '안반데기(안반덕)'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해발 1100m, 면적 198만㎡(약 60만평)의 국내 최대 고랭지 배추 산지다.
기록적인 8월 폭염과 가뭄에 이은 기습 호우로 배추 뿌리와 잎이 생기를 잃고 상해버린 것이다. 쓸 만한 배추가 트럭으로 옮겨진 뒤 밭에는 버려진 배추가 수북했다.
추석을 목전에 두고 고랭지 배추 수확이 한창일 시기지만, 이날 밭에 나온 인부는 몇 되지 않았다. 올해 배추 작황이 부진해 일거리가 줄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일대에서 15년간 배추 수확을 해왔다는 조춘호(63)씨는 "올해 같은 흉작은 처음"이라며 "일거리가 작년의 절반도 채 안 되고, 성한 배추를 골라내는 게 주된 일"이라고 했다.
농민 최모씨는 "안반데기는 다른 배추 산지보다 지대가 높아 상황이 그나마 나은데 이 정도"라며 "사람이 며칠 굶다 한꺼번에 뭘 먹으면 탈이 나듯, 가뭄 때문에 말라 있다 갑자기 비를 맞아 망가진 배추가 4분의 1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작황 부진에 '금(金)추' 된 추석 배추
7~8월 강원도 지역 고랭지 배추 생산량은 평년 대비 약 30% 감소했다. 삼척·태백 등 해발 400~600m의 준고랭지 지역도 낮 최고기온이 30도까지 오르는 폭염이 계속돼 진딧물, 무름병과 잎마름병 같은 병충해가 크게 번진 탓이다. 예년엔 해발 800m 이상에서 재배되는 고랭지 배추가 8월 말부터 본격 출하돼 배추 수급의 '안전판' 역할을 했지만, 올해는 폭염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신통치 않다.
전국적으로 배추 가격이 급등하면서 추석 배추 물가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9일 기준 고랭지 배추 상품(上品) 1포기의 소매가격은 전국 평균 8128원까지 치솟았다. 배추 값이 저렴했던 작년 같은 시기(2861원)보다 184% 뛰었고, 평년(3543원) 대비로도 배가 훌쩍 넘는다. 한 달 전만 해도 포기당 4010원이던 가격이 서울, 제주 등 일부 지역에선 1만원을 호가한다. 2010년 배추 파동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도매가격도 마찬가지다. 9일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발표한 추석 성수품 가격 현황을 보면 배추 10㎏ 가격이 1만9697원으로, 전년(6370원) 대비 3배를 넘어섰다.
정부는 "추석을 앞두고 배추·사과·배 등 10대 성수품 공급량을 40% 늘리겠다"고 했지만, 뛰어오르는 배추 값을 잡진 못하고 있다. 산지에선 포기당 1000원 안팎인 가격이 운송, 도매시장 상장, 경매 과정에서 뛰어오르고, 다시 중도매인, 유통점, 소매상까지 복잡한 유통 단계를 거쳐 시장에선 1만원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폭염 탓에 속이 다 차지도 않은 저품질 배추까지 급하게 시장에 풀리고 있는 상황이다.
◇사라져가는 고랭지 배추밭… 농민들 "대책 없는 정부 답답"
김재수 신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취임 닷새만인 10일 안반데기를 찾았다. 폭염과 수급 예측 실패로 가격 급등이 이어지자 배추 작황 및 출하 동향을 직접 챙겨보기 위해서다.
최근 고랭지 배추 수확량이 줄어든 배경엔 재배 면적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탓도 크다. 15년 전인 2001년만 해도 1만㏊가 넘던 배추 재배 면적이 올해 약 4400㏊까지 떨어졌다. 기후 온난화로 재배 가능한 면적이 줄어든 데다 중국산 김치 수입이 늘면서 고랭지 배추 농사의 수익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랭지 배추 생산량의 92%를 차지하는 강원도에서도 최근 배추 농가는 줄고 사과 등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다. 농촌진흥청은 2050년 고랭지 배추 재배 면적이 지금의 1%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란 관측도 내놨다.
배추 농가들은 "가뭄엔 같은 지역에서도 배추밭이 양지인지 응달인지에 따라 수확량이 크게 차이 나는데, 정부가 농사 망친 농가들을 위한 대책엔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농민 이모씨는 "정부가 지난달 말 내놓은 배추 수급 대책이란 것도 결국 수급 조절용 물량이 서울 가락시장에 조기 출하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전부"라며 "당장 배추 시세만 떨어뜨리겠다는 생각뿐 피해 농가에 대한 언급은 없어 '힘들면 배추 농사 짓지 말라'는 것 같다"고 했다.
농가들은 배추 모를 밭에 옮겨 심기 전에 미리 밭째로 산지 유통인(중간 상인)에게 파는 ‘밭떼기 거래’를 많이 하기 때문에 배추 값이 올라도 농가 소득엔 큰 영향이 없다. 그러니 ‘제발 걱정 없이 농사 지을 여건만 마련해달라’고 읍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매년 재배 면적이 줄어드는 데다, 기후변화로 인해 이제는 배추 출하 시기를 조절해서 가격을 안정시키는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며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물량 확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최병옥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협 계약 재배를 늘리는 한편 산지 유통인들도 배추 수급 파트너로 끌어들이면서, 중·장기적으로는 여름철 폭염에 대비해 용수 공급 시설을 더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