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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의 밥상 공부] 광해군이 먹고 감탄해 벼슬까지 내린 잡채는?

  • 정재훈 약사 음식칼럼니스트

  • 입력 : 2016.09.14 07:00

    ‘음식디미방' 보면 잡채는 각종 채소와 꿩고기를 볶은 음식
    20세기 초까지 당면 잡채는 상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기도
    부추 잡채, 고추 잡채, 당면 잡채... 음식 전통 다양하게 유지돼야

     명절 단골 메뉴인 잡채는 당면과 시금치, 당근, 양파, 쇠고기 등 정해진 재료로 만들어진다./사진=조선DB
    명절 단골 메뉴인 잡채는 당면과 시금치, 당근, 양파, 쇠고기 등 정해진 재료로 만들어진다./사진=조선DB
    잡채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 음식인가? 의문이 생긴 건 십여 년 전 캐나다 토론토의 베트남 국수집에서였다. 메뉴판의 크리스탈 누들이란 말에 호기심이 생겨 평소에 먹던 쌀국수 대신 시켰더니 국물에 당면을 말아 내온 것이다. ‘당면’하면 명절 잡채, 분식집 김말이, 한식집 갈비탕을 떠올리던 시절이었다.

    베트남 사람들도 당면을 먹다니, 그것도 갈비탕에 당면을 조금 넣은 정도가 아니라 한 그릇을 온전히 당면으로 즐긴다니 충격이 상당했다. 베트남 쌀국수와 동일한 육수로 만든 국물이었지만, 그 안에 당면이 들어간 게 낯설어서였는지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 광해군 때 처음 등장한 잡채… 당면은 들어가지 않아
    베트남 사람들만이 아니다. 태국 사람도, 인도네시아 사람도, 필리핀 사람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면을 먹는다. 그러나 당면의 시작은 중국이다. 당면이라는 이름 자체가 당나라에서 들어온 면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이 전분으로 국수를 만든 것은 1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송나라 때 문헌에는 녹두 당면의 제조와 판매에 대한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당면 비슷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먹는 형태는 냉면에 가까웠다. 당연히 잡채에도 당면이 없었다.

    지금은 당면을 넣은 잡채가 명절 대표 음식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우리가 지금 먹는 잡채는 본래의 잡채와는 다르다. 잡채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다. 이충이라는 사람이 바친 잡채가 왕의 마음에 들어 호조판서에까지 올랐고, 그로 인해 당시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뇌물로 출세를 했으니 비난 받을 만했지만, 이충의 잡채가 맛이 좋기는 했나보다. 불행히도 조리법이 나와 있지 않아 그의 잡채가 어떤 식으로 만든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후대의 기록인 ‘음식디미방’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잡채는 오이, 무, 표고버섯, 석이버섯, 송이버섯, 숙주나물, 도라지, 박고지,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시금치, 가지 등의 다양한 채소와 꿩고기를 볶아서 만든 음식이었다. 채소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했고, 고기는 꿩고기였으며, 당면은 없었다. 20세기 초에야 한반도에 당면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생겼고, 지금처럼 당면을 넣은 잡채가 비로소 ‘조선요리제법’과 같은 요리책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 시대에 따라 달라진 잡채 조리법…하나의 정해진 레시피만 인정하기 때문
    모두가 아무 저항 없이 당면 잡채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잡채에 당면을 넣는 것을 상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잡채에 해삼과 전복은 채쳐 넣어도 좋지만 당면을 데쳐서 넣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쉬운 것은 이후의 상황 전개다. 어느 날부턴가 당면을 넣은 잡채가 대세가 되면서 전통 방식의 잡채는 자취를 감추고, 당면을 중심으로 시금치, 표고버섯, 양파, 당근 등의 채소 몇 가지와 고기를 넣은 간소화된 형태의 잡채만 살아남았다.

     중식 요리인 고추 잡채는 흔히 잡채의 변형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당면 잡채보다 전통 잡채의 형태와 비슷하다./사진=조선DB
    중식 요리인 고추 잡채는 흔히 잡채의 변형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당면 잡채보다 전통 잡채의 형태와 비슷하다./사진=조선DB
    정답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한 가지 형태의 음식이 대세가 되면 그것이 바로 정답이 되고, 나머지는 오답이 된다. 당면 잡채가 정답이 되자 나머지 오답은 사라졌다. 그 결과, 우리 시대에 채소와 고기만으로 볶은 잡채를 볼 수 있는 것은 중국음식점 메뉴판에서뿐이다.

    맛의 전체 패턴으로 보면 당면 잡채도 분명히 한식이지만, 재료만 놓고 보면, 중국집에서 시켜먹는 고추잡채, 부추잡채가 요즘 명절 상에 올리는 가정식 잡채보다 옛날 잡채에 가까운 셈이다. 대한민국의 중국음식점에는 당면 잡채와 채소 잡채가 모두 살아남았는데, 정작 한식 메뉴에는 당면 잡채만 생존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고 보니 마트에서도 가끔 숨이 막혔던 때가 있다. 사과는 부사가 정답이고, 달걀은 갈색란, 쌀은 자포니카가, 라면은 매운 라면이 각각의 정답인 마냥 진열된 것을 보고 있으면 답답했다. 같은 식으로 당면 잡채가 정답이 되고 과거의 잡채는 사라졌으리라.

    다행히 요즘 마트의 모습은 다르다. 안 매운 라면도 많고, 백색란도 눈에 띄고, 사과의 색깔도 전보다 다채롭다. 조금씩, 천천히 더 다양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옛날 당면이 아니라 옛날 잡채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당면 잡채가 사라지지 않기 바란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잡채를, 음식을 맛좋게 하는 양념도 다양성이니까.

    [정재훈의 밥상 공부] 광해군이 먹고 감탄해 벼슬까지 내린 잡채는?
    ◆ 정재훈은 과학, 역사, 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음식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약사다. 강한 잡식성으로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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