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이지 싶다. 일주일 일정으로 독일 와인 취재를 다녀왔다. 독일은 전통적 화이트와인 강국이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지중해에 연한 국가들보다 위도가 높아 품질 좋은 레드와인은 만들지 못한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에 필수적인 일조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은 이 같은 악조건을 극복했다. 강변따라 경사진 언덕배기에 포도밭을 조성해, 햇빛을 직접 받으면서 동시에 강물에 반사된 햇빛까지 받아 일조량 부족을 나름 해결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독일 화이트와인이다. 때문에 유명 화이트와인 산지들이 라인강변 따라 이어져 있다.
그때 꿀맛 같은 와인을 처음 마셔봤다. 아이스 와인(ICE WINE)은 포도송이가 얼 때까지 포도 수확을 늦추어 만든 ‘슬로우 푸드’다. 대개 포도는 9월에 딴 직후 과즙을 짜서 발효를 거쳐 와인 탱크에 오래 숙성을 시켜 와인을 만든다. 그런데 아이스 와인은 한겨울에 포도송이가 언 다음에 딴 포도로 빚는다. 포도가 얼면 당분은 얼지 않고 포도가 머금고 있는 물만 얼게 된다. 이때 포도송이를 일일이 손으로 따서 과즙을 짜면 일반 와인용 과즙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 맛이 강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이스 와인은 치즈케이크, 티라미슈 같은 디저트 음식과 잘 어울린다. 색깔도 황금 색으로 꿀과 비슷하다. 아이스 와인은 너무 달기 때문에 일반 음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 보시라. 진한 설탕물, 혹은 꿀을 음식과 함께 먹고 싶겠는가?
그런데 진짜 꿀로 만든 와인이라니? 꿀 맛 나는 와인(아이스 와인)과 꿀로 만든 와인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부로길 110에 자리한 아이비 영농조합법인은 2011년부터 허니비 와인(HONEY BEE WINE)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아이비 영농조합법인은 꿀 재배 농가들 단체다. 술 원료는 이곳에서 키운 벌에서 채집한 꿀이다. 와인 양조장 주변 곳곳에 양봉 시설들이 늘려 있었다. 그 주위를 맴도는 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허니비 와인은 경기도농업기술원 이대형 박사가 개발했다. 이 박사는 학부에서 박사 학위 취득 때까지 술 연구를 계속 해온 술 박사다. 이대형 박사는 “허니비 와인은 남아도는 꿀을 어떻게 하면 소비를 늘릴 수 있을까 연구하다가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이비 영농조합의 앙경열 대표가 2009년에 경기도농업기술원에 꿀 가공 식품을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기술원에서는 꿀을 원료로 한 과자, 식초, 술 등을 개발해오던 중 최종적으로 꿀 와인을 개발, 2011년에 영농조합에 기술이전시켜, 지금껏 아이비 영농조합에서 허니비 와인을 만들고 있다.
허니비 와인 개발 스토리를 좀 더 들어봤다. 이대형 박사의 설명이다. “꿀에 효모를 넣으면 꿀의 당분이 알코올로 바뀐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꿀의 당분이 너무 강해 발효(당분이 알코올로 바뀌는 공정) 자체가 잘 안되더군요. 그래서 시도한 것이 전통 술 제조법입니다. 효모를 대량으로 배양시켜 밑술을 만든 뒤 여기에 꿀, 물(꿀 양의 네 배)을 넣어 발효에 성공했습니다. 물을 많이 넣어 희석시키는 이유는 너무 달면 효모가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약 일 년 동안 수백 번의 실험을 거쳐 꿀 와인 발효 기술을 터득한 것이죠.”
허니비 와인은 아카시아꿀을 메인으로 해서 잡화꿀을 일부 섞어 만든다. 약 10일간의 발효를 거친 뒤 저온창고에서 6개월 정도 보관해 두었다가 병에 담아 판매한다. 500ml 한 병에 3만5000원. 일부 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나 생산량이 많지 않아 대형마트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럼 꿀 와인 맛은 어떨까? 허니비 와인은 화이트와인처럼 10 도 정도로 차게 마시는 게 좋다. 온도가 높으면 단 맛이 너무 도드라져 오히려 마시기가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허니비 와인 향을 먼저 느껴봤다. 예상했던 대로 꿀 향이 진했다. 한 모금 마시니까 꿀 맛 외에 귤 같은 과일 향이 느껴졌다. 이대형 박사는 “술 향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한약재인 진피(귤 껍질 말린 것)를 조금 넣어 쓴 맛이 약간 느껴지게 했다"고 말했다. 꿀이 가진 달콤함은 살리고 대신, 꿀의 끈적끈적한 점성은 없애 상쾌하게 마실 수 있도록 했다.
허니비 와인은 당초 허니와인으로 상표 등록하려 했으나 ‘허니’가 일반명사이기 때문에 부득이 허니비 와인(꿀벌 와인)으로 정했다. 꿀 와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이미 북유럽에서는 미드(Mead)라는 꿀로 빚은 와인이 유행했고, 지금도 시판 중이다. 이름에서 연상이 되듯 꿀 와인에는 신혼부부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부가 아이를 빨리 가지기 위해 한달 동안 외부 출입을 금하고 허니와인(꿀 와인)만 마셨다는 이야기다. 이런 일화가 지금까지 전례돼 허니(HONEY)는 자기, 여보로 불리며 달콤한 사랑의 2인칭 대명사가 됐다. 문(MOON)은 한 달을 의미해 신혼여행을 뜻하는 허니문(Honey Moon)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허니비 와인 역시 평상시에 마시기 좋은 술 이라기 보다는 결혼 피로연이나 신혼부부에게 주는 선물로 적당하지 않나 싶다. 허니비 와인은 해외의 술 품평회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세계3대 주류 품평회의 하나인 몽드셀렉션에서 2014년 은상에 이어 2015년에는 금상을 받아 2년 연속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허니비와인의 명성이 올라가자 중국, 일본의 주류 바이어들도 러브콜을 하고 있다. 한국의 꿀 와인을 수입하고 싶다는 요청이다.
그러나, 허니비 와인은 현재 양조시설 규모가 작아 수출 물량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이비 영농조합법인 양경열 대표는 “경기도에 생산 증설에 따른 예산 지원 요청을 해서 긍정적인 답을 들었다"며 “허니비 와인이 경기도가 매년 생산하는 꿀 10만 여톤의 30% 정도를 소화해주면 관련 농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농업기술원 이대형 박사가 개발한 술은 허니비 와인뿐만이 아니다. 산양삼 막걸리, 파주 콩막걸리, 이천 쌀 막걸리 등 이미 10 여개 술을 개발, 해당 영농조합에서 생산을 하도록 기술이전을 해주었다. 증류식 소주로 유명한 경기 김포의 문배술에는 증류주 숙성 기간을 단축시키는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이대형 박사는 "기술원에서 개발한 술이 지역의 농산물 소비를 촉진시키는 동시에 애주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농가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는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앞으로 국산 한약재를 넣은 증류주를 젊은이들이 좋아하게끔 리큐르 제품으로 만들 욕심을 갖고 있다. 아쉽게도 우리 전통 술이 젊은이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해서, 젊은이들이 홍대 클럽 같은 곳에서 즐겨 마실 우리 술을 만들고 싶다는 게 이 박사의 바램이다.
※이 기사에는 대동여주도 콘텐츠 제작자 이지민 대표가 협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