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권 최고의 수퍼컴퓨터 전문가로 꼽히는 이지수(54) 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박사는 지난 5월 '중동의 MIT'로 불리는 킹압둘라과학기술대(KAUST) 수퍼컴퓨터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종신직 센터장과 현재 연봉의 3배 이상, 고급 주택과 무제한 보험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A 교수도 미국 애플의 영입 제안을 받고 고민하다 최근 사표를 냈다. 인간 공학 디자인 전문가인 A 교수는 국내 최고 수준의 공대에서 65세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직을 포기하고 미국행을 택했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7년부터 3년간 삼성전자의 모바일 디자인 분야에서 근무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뇌과학 전문가인 이모(38) 교수는 최근 기초과학연구원(IBS)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미국에 남기로 했다. 이 교수는 "한국은 위계질서가 너무 강하고 행정 업무도 많아 적응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핵심 연구개발(R&D) 인력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한국이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를 넘어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로 전환해야 할 시기에 제조업 공동화를 넘어 R&D 공동화까지 우려해야 할 상황에 닥친 것이다.
◇이공계 인재들 "한국 떠나고 싶다… 돌아오기도 싫다"
본지가 7월 초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와 공동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한국인 이공계 박사 1005명 중 '해외 취업을 우선 고려하겠다'는 응답이 절반(47%)에 육박한 반면 '국내에 남겠다'는 답은 31%에 그쳤다. 2013년 미국과학재단(NSF) 조사에서도 미국 내 한인 박사 중 60%가량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반면 현재 국내에서 일하는 이공계 박사 9만7000명 중 3만5308명(36%)은 이민이나 장기 체류를 통해 해외로 나가길 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조사).
우수 두뇌들이 한국을 외면하는 이유는 뭘까? 본지 조사에서 이공계 박사들은 두뇌 유출 원인으로 '지나친 단기 실적주의와 연구 독립성 보장의 어려움'(59%)을 가장 많이 꼽았다. 그다음이 '국내 일자리 부족'(41%)과 '선진국보다 열악한 처우'(33%)의 순서였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새로운 실험을 설계해 제안하거나 오류를 지적하면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는 말만 들을 때가 잦다"면서 "젊은 박사들은 돈보다도 한국 특유의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것을 더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미국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으로 이직을 추진 중인 한 프로그래머는 "해외 기업에서는 나이와 직위에 상관없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데 동경심을 가진 동료가 많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게임업계도… 간판 기업 핵심 인력도 '脫한국'
기업에 있는 고급 인력들도 속속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삼성의 독자 모바일 운영체제 '바다(bada)'를 개발한 주역인 홍준성(47)씨는 'S급 인재' 대우를 받았으나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며 지난해 10월 구글코리아로 이적했다. 중국 화웨이의 김준서(47) 모바일 디자인 총괄사장은 삼성전자에서 9년간 근무하다 2012년 화웨이로 옮겼다. 이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게임 분야의 젊은 엔지니어들도 줄줄이 해외로 떠나거나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SK그룹의 한 CEO는 "요즘 공대생의 취업 1순위는 구글, 2위는 네이버, 3위가 대기업"이라며 "한국의 젊은 인재들이 대기업을 바라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인재 유치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임원급은 최소 2~3년, 일반 박사급 인재도 6개월 이상 공을 들여 데려와야 한다"며 "고급 인재일수록 가족들이 해외 생활을 더 선호하는 데다 한국의 조직 문화와 업무 강도도 기피 요인"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2014년 실리콘밸리에 R&D 전진기지인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를 설립해 현지 인재 유치에 나서고, 최근 대대적인 조직 문화 혁신에 나서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