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울산 남구 석유화학단지 한화종합화학 공장. 합성섬유 원료인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을 만드는 생산라인 3개 가운데 1번 라인이 있는 건물 출입구는 닫혀 있었다. 설비 주변에는 접근을 막기 위한 빨간색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었다. '서바이벌(Survival) 100'이라고 쓰인 현수막도 보였다. 올 1월 초 걸어놓은 것으로, 생존을 위해 100주 동안 뼈를 깎는 원가 절감을 하자는 구호다.

연간 40만t의 PTA를 생산했던 이 라인은 지난해 10월 가동이 중단됐다. 2011년 대대적인 개·보수로 효율을 높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PTA가 쏟아지면서 팔 곳이 없어지자 울산 공장 전체 생산 물량의 30%를 줄였다. 회사 관계자는 "3~4년 전까지 생산 제품의 절반 이상을 중국에 팔았지만, 이젠 중국 내에서 자체 공급 과잉이 나타나면서 수출이 급감했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울산 남구 석유화학단지 내 한화종합화학 공장 전경. 공장 입구에는‘서바이벌 100’이라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다. 서바이벌 100이란‘생존을 위해 100주간 뼈를 깎는 원가 절감 노력을 하자’는 한화종합화학의 구호다. 최근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중국발 석유화학 제품의 공급 과잉으로 생존 여부를 걱정하고 있다.

중국의 고도성장과 함께 대중(對中) 수출로 특수(特需)를 누리다가 이제는 중국발 공급 과잉 탓에 생존을 걱정하는 한국 주력 산업의 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국제 수준의 제조 설비를 갖춘 중국 기업들이 본격적 증산에 들어가면서 한국 기업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PTA 대중국 수출액 4년 만에 95% 감소

울산 석유화학단지에 있는 롯데케미칼도 상황이 비슷했다. 이 회사는 연간 110만t 규모로 PTA를 만들었지만 생산 라인 중 절반 가까이를 다른 석유화학 제품 생산으로 돌렸다. SK유화의 경우 2년 전부터 PTA 가동을 아예 중단한 채 공장을 비워놓은 상태다.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은 2011년 PTA 한 품목으로 37억달러(4조3400억원)어치를 중국에 수출했지만, 지난해에는 1억9000만달러(2230억원) 수출에 그쳤다. 글로벌 PTA 수요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이 자국 내 생산을 늘리면서 자급률이 100%를 넘어선 결과다. 현재 중국은 PTA 생산 능력이 수요보다 2000만t 이상 많다. 최대 시장인 중국 수출길이 막히자 국내 업체는 PTA 생산량을 최근 3년 새 30% 줄었다. 정부는 지난 4월 '5대 취약업종'으로 석유화학을 지정하며 PTA를 사례로 들었다. 업체 관계자는 "문제는 제2, 제3의 PTA가 나온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PTA뿐만 아니라 폴리염화비닐(PVC) 같은 범용 제품은 속속 중국 자급률이 100%를 넘고 있다.

중국산 때문에 몸살 앓는 주력 업종

철강 업계도 저가 중국산 탓에 몸살을 앓고 있다. 올 들어 건설 현장에서 사용되는 중국산 철근은 지난해보다 2배 정도 늘었다. 국내 건설 경기 회복세를 틈타 국산보다 20% 가까이 싼 중국산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 주요 중국산 철강재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30%를 웃돌고 있다.

중국산 석유 제품도 곧 한국 업체를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석유 정제 능력은 지난 10년간 2배로 확대됐다. 공급이 1억t 이상 과잉 상태인데도 올해 쿤밍(昆明)에서 연간 1000만t 규모의 정제 능력을 갖춘 정유 시설이 가동에 들어가는 등 증설을 멈추지 않고 있다. 석유제품 수입 대국이었던 중국은 '순수출국'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저유가 기조로 국내 정유업체의 수익성이 개선돼 수면 밑에 있지만, 한국 정유업계는 세계 시장에서 중국과 벌일 힘겨운 싸움을 앞두고 있다.

첨단 산업 분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 BOE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에 10.5세대 패널 공장을 세우고 2018년까지 2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세대는 공장이 얼마나 큰 크기의 패널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한국 업체는 현재 8세대, 중국은 8.5세대로, 세대 분류로만 보면 이미 한국은 중국에 뒤지고 있다.

◇통상 마찰 원인으로 작용

참다못한 한국 기업이 중국 업체를 제소하는 경우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는 지난달 국내 화학업체가 중국산 이산화티타늄(페인트·플라스틱 등에 쓰이는 제품)을 대상으로 제기한 반덤핑 제소 관련 본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이 공급과잉 상태인 이 제품 수출을 늘려, 국내 시장에서 중국산 비중은 73%다.

이렇게 중국의 공급과잉은 세계 통상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중국의 알루미늄 생산량은 지난해 3200만t으로, 10년 전보다 두 배 증가했다. 중국산 알루미늄이 수출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 국제 알루미늄 가격은 지난 5년간 40% 폭락했다. 미국 내 알루미늄 제련 공장은 2000년 23개에서 지난해 4개로 급감해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은 최근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중국을 상대로 알루미늄 생산 감축을 요구했다.

최용민 무역협회 베이징지부장은 "중국산이 한국으로 들어와 시장을 흔드는 것도 문제지만, 중국 내부 조달 비중이 높아지면서 한국의 대중 수출이 줄어드는 구조적 문제가 더 심각하다"며 "중국이 따라오기 어려운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중국 일변도의 수출 전략에서 벗어나 수출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PTA(고순도 테레프탈산)

폴리에스터 같은 합성섬유와 페트병을 만드는 데 원료로 쓰는 석유화학제품. 중국 업체들이 생산량을 늘리면서 대표적인 공급 과잉 품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