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운전하던 중 피로로 눈이 감겨온다. 운전자의 개입 없이도 차가 스스로 운전하는 자율주행 기능을 켠다. 핸들을 놓았는데도 차가 속도를 줄였다 높이는 걸 반복하면서 길을 찾아 나간다. 100미터 전방 도로 한복판에 놓인 낙석 파편. 차의 전방에 달린 센서가 이 상황을 인식하고 낙석을 피해간다. 조금 더 가다보니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 시야를 가렸지만 차는 내려받은 내비게이션 정보와 이전에 이곳을 지나치며 인식하고 기록한 정보를 토대로 아무 문제없이 자율주행을 지속한다.’

이 상황은 증강현실(AR)과 인공지능(AI)을 통해 컴퓨터가 사람 눈처럼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분석 기술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을 활용한 자율주행차의 미래를 그린 것이다. 컴퓨터 비전은 사람의 '두뇌'와 '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컴퓨터의 연산, 기록장치와 카메라로 구현하는 기술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한 영역으로, 센서를 이용해 동작을 감지하거나 시각정보를 해석해 공간을 인식한다.

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자율주행 등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미국 연구개발(R&D) 법인인 리서치아메리카(SRA)에 '컴퓨터 비전·AR' 랩(lab·연구실)을 신설하고, 랩장으로 인도 출신의 천재 개발자로 불리는 프라나브 미스트리(Pranav Mistry, 35세) 상무를 선임했다.

◆ IT업계가 주목하는 컴퓨터 비전·AR…삼성 맹추격

자율주행차를 연구하는 모든 IT 기업들은 컴퓨터 비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애플의 자율주행차 프로젝트 '타이탄'을 예로 들면, 자동차 스스로 외부 지형을 파악하고 주행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과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 애플은 이를 확보하기 위해 컴퓨터 비전과 인공지능 전문가를 대거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과 반도체 설계 기업 ARM 역시 자율주행 연구를 위해 지난달 말 각각 컴퓨터 비전 벤처회사인 '잇시즈(Itseez)'와 '애피컬(Apical)'을 인수했다.

삼성전자(005930)는 새롭게 꾸린 연구실에서 일할 경력직 모집에도 나섰다. SRA는 경력자 채용 모집 공고에서 3차원(3D) 디스플레이와 다차원 이미징, 컴퓨터 그래픽 알고리즘 지식을 가진 지원자를 우대한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전장(電裝, 전자장비)사업에 힘을 모으고 있는 삼성전자가 자율주행 시스템 개발을 위한 핵심 기술 확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라며 "꼭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사이니지(상업용 디스플레이)와 같은 다른 B2B(기업간거래) 영역으로의 활용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증강현실은 컴퓨터 비전이라는 '눈'으로 보고 분석한 것을 이용자에게 현실감있게 3차원(3D)으로 재현할 때 필요한 기술이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홀로그램 화면을 띄워놓고 아이언맨 설계 작업을 하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 신설된 랩 이끌 MIT 출신 30대 천재 상무

삼성전자 '컴퓨터 비전·AR' 랩장을 맡은 프라나브 미스트리 상무는 삼성전자의 파괴적 혁신을 담당하는 SRA 소속 싱크탱크팀도 이끌고 있다. 그는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젊은 글로벌 리더'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천재급 인재로 통한다.

미스트리 상무가 삼성전자(005930)로부터 '러브콜'을 받게 된 것은 2009년 지식공유 강연회 TED에서 선보인 그의 AR 기술 '식스센스(sixthsense)' 때문이었다. 식스센스는 종이나 평면에 빛을 비춰 영상을 재현하고 손가락을 이용해 그 영상을 조작하는 AR 기술이다.

예컨대 간단한 웹캠과 프로젝터, 스마트폰, 손가락의 센서 등 현존하는 기술만으로 손바닥 위에 전화기의 숫자패드를 만들어 전화를 걸거나, 종이 한 장을 게임기 또는 영화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식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의 차기 갤럭시기어 스마트워치에 프로젝터를 넣어 이 기술을 구현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프라나브 미스트리 상무.

신설된 '컴퓨터 비전·AR' 랩은 미스트리 상무가 기존에 이끌고 있던 싱크탱크팀(TTT)과 긴밀하게 협력할 것으로 보인다. TTT는 파괴적인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행에 옮겨 실험하는 데 주력하는 조직이다. 최근의 성과는 가상현실(VR) 기기용 영상 제작을 위한 360도 입체 촬영 카메라 '프로젝트 비욘드'의 개발이었다.

프라나브 상무는 4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삼성개발자콘퍼런스'에서 비욘드 출시를 알렸다. 둥근 원형디스플레이를 사용하고 가장자리의 동그란 베젤(테두리)을 돌려 각종 기능을 조작하는 스마트워치 기어S2도 TTT의 작품이다.

익명을 요구한 SRA 관계자는 "미스트리 상무의 경우, 디자인과 엔지니어 기술을 다 갖춘 사람으로 평가받는다"라며 "창의성을 구현할 도구들을 가진 셈"이라고 말했다.